[독후감] 인물로 보는 항일 무장 투쟁사
- 최초 등록일
- 2007.08.08
- 최종 저작일
- 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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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물로 보는 항일 무장 투쟁사 서평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줄거리 요약
3. 마치며
본문내용
이청천과 양세봉두 사람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은 철저한 무력투쟁론자라는 사실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실이 두 사람 모두 당시의 만주 동포들로부터 `장군`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이청천은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반데 중국국민당정부 계열의 항일의용군과 연결되어 활동했고, 양세봉도 이 시기에는 주로 국민당정부 계통 및 지방의 토호라든가 세력가가 주도하는 중국인 의용부대와 함께 싸웠다. 특히 양세봉 장군은 1934년 9월에 돌아가셨지만 1934년 초반경이 되면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인민혁명군이라고 하는 무장세력과도 연합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또 이청천은 1920년대 초반까지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서 동맹 또는 연합하려는 태도를 취하다가 나중에는 반공지향을 분명히 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반면 양세봉은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 초까지는 계속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운동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1933~1934년경에 가면 점차 사회주의계열 투쟁세력과 연대하려는 자세로 전환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이들이 참여하고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의 성격 및 당시 상황과도 밀접히 연관된다. 그 이유는 이청천이 관계했던 독립운동 단체들이 주로 반공 성향을 띤 사실을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1933년 말 이청천이 영도하고 있던 한국 독립군 장병 40여 명이 중국 관내로 이동하게 되는 배경에도 1931년 9월의 만주사변 이후 같이 연합해서 싸우던 중국인 항일의용군 안의 중국 공산당 추종세력과 불화했던 동기가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한편 양세봉은 국민부와 조선혁명군 초창기 시절에는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인 1934년 초반경에는 동북인민혁명군이란 중국공산당측 부대와 연합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독립군을 키워야 민족이 산다 - 이상설과 박용만 (윤병석)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여러 사람의 평을 했는데 그때 최상의 평을 받은 사람이 이상설이다. "이상설이야말로 한국의 백년대계를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고 교육발전을 기하는 사람" 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상설은 글을 잘썼다. 문재였다. 24살 때 과거에 합격하여 망해가는 나라이지만 성균관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