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이승만
- 최초 등록일
- 2007.07.04
- 최종 저작일
- 20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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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생애에 대한 간단한 레포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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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조부가 황해도 평산 능내동平山陵內洞에서 살다가 이박사가 3살 때 서울 도동으로 이사해서 살았다. 도동 우수현雩守峴 남쪽 오막살이에 살면서 학자 이근수李根秀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우남雩南이란 호號는 `우수현雩守峴 남쪽`이란 데서 따온 것이다.
조선왕조의 말기인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한 그는 13세 때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는 전통 한학에 정진하여 18세에는 사서삼경을 독파하는 경지에 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신학문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고 1894년에는 배재학당 영어과에 입학했다. 이승만은 선각자였던 서재필에게 세계역사와 지리를 배우고 배재학당 학생회인 협성회를 결성하는 데 앞장섰다. 영어를 배워 미국인들과 친교를 넓히기 시작한 이승만은 사회 활동 초기 언론에 주목하여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1898년 1월 1일 협성회 회보를 창간, 주필이 되어 논설을 쓰고 이를 발전시켜 일간지 매일신문의 발간을 주도한다. 1898년 4월 9일 제호를 바꾼 매일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이다. 이보다 앞선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은 격일간이었다. 이승만은 같은 해 8월 10일 창간한 제국신문의 주필을 맡아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는 등 활발한 언론 활동을 벌였다.
이승만은 언론과 함께 정치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에서 활동하며 황국협회의 보부상들과 대결하는 선봉장 역할을 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해산 당한 뒤 이승만은 1899년 1월 9일 투옥됐다. 황제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덮어쓴 것이었다. 선교사들의 통역을 맡았던 이승만은 미국인들의 도움으로 미국공사관이 나서 조선정부에 석방을 촉구했다. 석방교섭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 이승만은 탈주를 시도하다가 붙잡혀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이승만의 수형생활은 특이했다. 그는 옥중에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동료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제국신문 등에 논설도 집필했다. 그는 옥중에서 저서도 집필했다. 그가 얇은 종이에 쓴 ‘독립정신’은 노끈으로 위장되어 반출되었고 박용만이 미국으로 가져가 1910년 2월 출판됐다. 일제는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금서로 규정하여 판매를 금지시켰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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