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단재 신채호선생의 일생과 리더십
- 최초 등록일
- 2006.12.21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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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일생과 단재 신채호 선생이 보여준 리더십의 원천을 분석
목차
1. 단재 신채호 선생의 일생
2. 단재 신채호 선생의 리더십 원천
본문내용
1. 단재 신채호 선생의 일생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열강들이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하고자 노리고 있던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 마을에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8살 되던 해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훈장을 하고 계시던 할아버지의 손에 자라났다. 할아버지로는 양반 의식이 강하고 매우 봉건적이였기 때문에 이러한 할아버지 밑에서 유학과 경전을 배웠으며 어린 시절의 신채호 선생은 매우 영특하고 재주가 탁월해 신동소리를 듣고 자라났다. 그러나 신채호 선생은 공부이외에는 그다지 똑똑한 편이 아니었지만 어려서부터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주장을 굽히는 법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정통 주자학을 배웠던 신채호 선생은 19때 성균관에 입학하게 된다.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면서 국내에 있던 개화파들이 간행한 신서들과 중국과 일본에서 들어온 신서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렇게 신서를 접하면서 신채호 선생은 사상은 기존에 할아버지로 배웠던 주자학에서 개화자강 사상으로 서서히 바뀌게 된다. 당시 서울은 개화자강 운동의 분위기로 휩싸였으며 신채호 선생 자신도 개화자강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개화자강 사상을 가지게 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개화자강파의 자유민권운동인 만민공동회 운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러다 경무청에 체포되어 구금을 당하다 석방하게 되었고 이후 성균관의 박사가 된다. 성균관 박사가 된 이후에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기자로 활동하게 되고 이후 황성신문이 폐간되고 난 후 대한 매일 신보의 논설기자로 있으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행위와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비판하는 기사로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게 된다.
참고 자료
신용하,우리의 사상을 찾아서(2)신채호의 생애와 사상과 독립운동 1991
김삼웅,‘단재 신재호 평전’ 2005
http://cafe.naver.com/danjae.cafe (사)단재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