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6.12.08
- 최종 저작일
- 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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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여운형에 대하여~~
목차
가계
활동사항
여운형 연보
인물로 읽는 남북현대사(1)
ꡐ좌우합작 민족화합의 정치지도자ꡑ 몽양 여운형(呂運亨)
-여운형을 둘러싼 논란
-항일과 건국준비
-좌우합작 남북연합의 새로운 조명
-진보적 민주주의자의 길
본문내용
활동사항
15세에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사립흥화학교(私立興化學校)를 거쳐 1903년 다시 관립우체학교(官立郵遞學校)로 옮겼으나 중퇴하였다. 그뒤 1907년부터 시작한 성경공부를 통해 기독교를 믿게 되었고, 1908년경에는 미국인 선교사 곽안련(郭安連)목사의 도움을 받아 1909년 사립기독광동학교(私立基督光東學校)를 세웠다. 1911년 평양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18년 상해에서 청년 동포들을 규합하여 민단(民團)을 조직, 광복운동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여 총무간사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가담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하였으며, 그해 12월 일본이 우리나라의 자치문제를 타진해오자 동경으로 건너가 일련의 회담에 참석하였다. 1920년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192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근로자대회(遠東民族勤勞者大會)에 참석하였고, 상해에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였다. 1922년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하였으며, 1924년 중국국민당에 가입, 남방혁명군(南方革命軍)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29년 영국의 식민정책을 비난하였다가 영국경찰에 체포된 후 일본으로 인도되어 3년간 복역하고 1932년 출옥하였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을 통해 항일투쟁 하였으며, 1936년 손기정(孫基禎)선수의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되자 사장직을 물러났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