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멸망
- 최초 등록일
- 2006.11.10
- 최종 저작일
- 2006.11
- 10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제1장. 두 안토니누스 황제 시대의 제국 판도와 군사력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피세 포기에 그의 장군들은 에티오피아와 아라비아 펠릭스의 정복을 시도했었다. 그들은 북회귀선 남쪽으로 1,000 마일 가까이 행군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외딴 지역의 기후가 침략군을 격퇴하여 비호전적인 원주민들을 보호해 주었다. 유럽의 북쪽 나라들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 정복할 만한 가치가 거의 없었다. 게르마니아의 삼림과 늪지대의 강건한 야만족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들은 자유를 빼앗기면 생명을 돌보지 않았으며, 따라서 비록 최초의 공격에서는 로마군의 힘에 눌려 굴복하는 듯했으나 곧 몸을 사르는 투쟁으로 독립을 되찾음으로써 아우구스투스에게 흥망성회의 무상함을 일깨워 주었다.
목차
제 1 장. 두 안토니누스 황제 시대의 제국 판도와 군사력
제 2 장. 두 안토니누스 황제 시대의 로마제국 통일과 내치
제 3 장. 두 안토니누스 황제 시대의 로마 제국의 정치체제
제 4 장. 콤모두스의 잔혹성
제 5 장. 야만족의 대규모 침입
제 6 장. 디오클라티아누스와 그의 3명의 동료 막시미아누스, 갈레리우스 및 콘스탄니우스의 통치
제 7 장. 디오클레이아누스 퇴위 후의 혼란
제 8 장. 기독교의 발전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사상
제 9 장. 콘스탄티노플의 창건
제 10 장. 이단 종파의 박해, 도나투스 교파의 분리
제 11 장. 갈리아 군다느이 율리아누스 황제 선포
제 12 장. 발렌티니아누스의 즉위와 그의 공동 통치자
제 13 장. 유목 민족의 퐁습, 중국에서 유럽에소의 훈족 이동
제 14 장. 고트족의 반란. 고트족의 그리스 약탈
제 15 장. 서로마제국 몰락의 개관
본문내용
제1장. 두 안토니누스 황제 시대의 제국 판도와 군사력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피세 포기에 그의 장군들은 에티오피아와 아라비아 펠릭스의 정복을 시도했었다. 그들은 북회귀선 남쪽으로 1,000 마일 가까이 행군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외딴 지역의 기후가 침략군을 격퇴하여 비호전적인 원주민들을 보호해 주었다. 유럽의 북쪽 나라들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 정복할 만한 가치가 거의 없었다. 게르마니아의 삼림과 늪지대의 강건한 야만족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들은 자유를 빼앗기면 생명을 돌보지 않았으며, 따라서 비록 최초의 공격에서는 로마군의 힘에 눌려 굴복하는 듯했으나 곧 몸을 사르는 투쟁으로 독립을 되찾음으로써 아우구스투스에게 흥망성회의 무상함을 일깨워 주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지혜롭게 충고한 이 중용적 체제는 그의 바로 뒤를 이은 겁 많고 사악한 후계자들이 인류의 평안을 위해 기꺼이 채택하는 바가 되었다.
서기 1세기 중에 로마제국이 얻은 유일한 영토는 브리타니아 속주뿐이였다.
로마 국경 지방의 이 같은 상황은 아우구스투스의 사망에서 트라야누스의 즉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덕망 있고 적극적인 트라야누스는 무인의 교육을 받아 장군의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선대의 평화 체제는 전쟁과 정복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리고 군단들은 오랜만에 군인 황제를 모시게 되었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이룩한 최초의 공적은 다키아 원정이었다.
로마제국은 세로 폭이 안토니누스 성벽과 다키아의 북쪽 끝에서부터 아틀라스산과 북회귀선에 이르기까지 2,000마일이 넘었고, 가로 폭은 대서양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기까지 3,000 마일이 넘었으며, 지리적으로는 온대 지방의 가장 살기 좋은 장소인 북위 24도와 56도 사이에 위치해 있었으며, 총 면적 160만 평방마일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로마제국의 영토는 대부분이 비옥한 농경지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