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시대의 재조명
- 최초 등록일
- 2006.10.27
- 최종 저작일
- 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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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태진 씨의 <고종시대의 재조명>을 읽고 요약과 비평한 보고서입니다. 다른 문헌도 참고하여 성심성의껏 작성하였습니다. 참고하셔서 좋은 성적 받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아울러 자료 구매하시는 분들을 위해 예쁜 레포트표지도 첨부하였습니다. *^^*
목차
1. 서 론
2. 본 론
1) 논문 요약
2) 주된 논지
3) 비 평
3. 결 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우리 역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1910년의 `병합`의 충격에서 비롯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사건으로 우리는 근대적인 사회를 스스로 만들 힘이 없었던 민족으로 생각하는 식자들이 많게 되었다. 이러한 패배주의적 역사 인식은 특히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 역사와의 대비를 통해 더욱 조장되어 왔다. 36년간의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뿌리가 깊어진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8․15 해방 이후에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이 글은 우리의 전통과 역사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언제부터 어떤 형태로 시작되었는지를 고찰하는데 목적이 있다.
1873년 고종은 친정을 선포하였다. 친정에 나선 고종은 개항․개화가 불가피하다는 판단 아래 1876년 개항을 단행한 다음 1880년부터 개화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18880년 수신사 파견을 통해 일본의 개화 실상을 확인한 다음, 개화를 주도할 관서로 통리기무아문을 신설하고 1881년에는 일본에 신사유람단, 중국에 영선사를 각각 파견하여 신문물 수용을 위한 대책을 적극적으로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국왕은 중국으로부터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문물 소개서들을 포함해 3천여 종 4만여 책의 중국 서적들을 사들였다. 그리고 국왕은 원활한 개화 정책의 수행을 위해 1883년부터 정부기관지로서 『한성순보』『한성주보』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18세기 탕평 군주들의 민국론은 19세기 세도정치 아래서 전면적인 반발을 받아 반 세기 이상 공백기를 거쳐 고종의 친정 선언으로 부활되었다. 고종의 개화정책은 완전 개방적인 서양화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동도서기(東道西器) 또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개화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고종은 재위중에 줄곧 `민국의 위기`란 용어로 시국을 진단하면서, 과거 수구세력의 반발로 불발에 그친 사노비 세습제의 혁파를 1886년에 자신이 재선언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종의 개화정책은 주무관서의 편성과 운영에서도 국왕 중심적인 성향을 강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왕현종, 「주제서평 : 민족적 관점에서의 한국 근대 정치사 연구비판과 `고종`의 절대화-
이태진, 『고종 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역사문제연구』6, 2001, 261~2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