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고문경학
- 최초 등록일
- 2006.06.13
- 최종 저작일
- 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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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진시황제의 유교 탄압 이후 유교 경서의 대부분이 실전되고 학자들은 주로 기억과 구전에 의지하여 경서를 익히고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 건국 이후, 실전된 유교 경서를 복원하는 작업이 이루어졌고, 그 작업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문헌에 의존하거나 학자들 사이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경서 및 그에 대한 주석, 정확히 말하면 학자들의 기억에 입각해 이루어졌다. 또한 복원 작업의 결과는 당연히 한나라 당대의 문자인 예서(隸書)로 기록되었다. 이렇게 예서로 다시 기록, 정리된 경서를 금문 경서, 즉 당대의 문자로 기록한 경서라 일컫는다.
목차
(1) 고문경학과 유흠
(2) 왕충
(3) 정치와 고문경학
본문내용
(1) 고문경학과 유흠
진시황제의 유교 탄압 이후 유교 경서의 대부분이 실전되고 학자들은 주로 기억과 구전에 의지하여 경서를 익히고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 건국 이후, 실전된 유교 경서를 복원하는 작업이 이루어졌고, 그 작업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문헌에 의존하거나 학자들 사이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경서 및 그에 대한 주석, 정확히 말하면 학자들의 기억에 입각해 이루어졌다. 또한 복원 작업의 결과는 당연히 한나라 당대의 문자인 예서(隸書)로 기록되었다. 이렇게 예서로 다시 기록, 정리된 경서를 금문 경서, 즉 당대의 문자로 기록한 경서라 일컫는다.
그런데 전한시대에 음양가의 학설로써 경을 해석하는 경학자들에 불만을 품고 마침내 또 다른 종류의 경학을 수립하여 대항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이 ‘고학’, 고문학파의 경학이다. 그것은 경을 해설할 때 위서나 참서 또는 기타 음양가의 말을 채용하지 않고 당시 이상하고 괴이한 주장을 쓸어내고 공자를 스승의 지위로 되돌렸다. 이런 경학자들은 실제 당시의 사상 혁명가였다.
그 중 유흠(? ~ A.D 23)은 사실상 ‘고학’을 제창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학은 모두 민간에서 흥기했고 학관(學官)에 세워지지 못했다. 한나라 성제(成帝)는 유향에게 궁중의 장서를 교정하도록 하고 중간실무자 진농에게 천하의 유서(遺書)를 구하도록 했는데, 고문경학파의 경전과 그 해석은 이 기회의 ‘유서’ 자격으로 궁중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유흠은 아버지 유향의 뒤를 이어 궁중 장서를 교정하면서 그것들을 중요시하여, 애제(哀帝)때 마침내 고문경학파의 경전과 그 해석인 좌씨춘추(左氏春秋), 모시(毛詩), 일례(逸禮), 고문상서(古文尙書) 등을 학관에 세우려고 했으나, 당시 박사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고, 그는 그들에게 맞서 논변했지만 끝내 이기지는 못했다. 아무튼 유행은 당시 정치상, 학술상의 지위를 바탕으로 사력을 다하여 ‘고학’을 위해서 분투했던 만큼 사실상 ‘고학’의 영수라고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