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개경파를 견제할 수 있었던 서경파 귀족에 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6.04.28
- 최종 저작일
- 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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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개경(開京)파를 견제할 수 있었던 서경(西京)파 귀족에 관하여 정리한 레포트 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국내외의 정세
3. 칭제건원과 금국정벌에 대한 서경파의 입장
4. 칭제건원과 금국정벌에 대한 왕의 입장
5.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1. 머리말
고려 중엽 인종대에 일어난 묘청 일파의 서경천천도운동은 이자겸의 난과 함께 고려 사회의 크나큰 사건으로 고려 귀족사회의 동요를 일으켰다.
이 서경천도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서경은 고려 태조때부터 줄곧 국왕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개경과 거의 대등한 규모로 성장하고 있었다. 문종은 서경에 좌ㆍ우궁을 지었으며, 예종은 원년에 용언궁을 창건하려 했던 것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발제문에서는 고려 개국 이래 중시되었던 서경의 역할을, 특히 서경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던 묘청의 난 전후로 서경파를 대표했던 윤언이, 정지상, 묘청, 백수한을 중심으로 국내외의 정세와 함께 개경파와의 대립과, 서경파를 바라보는 왕의 입장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2. 국내외의 정세
고려 일대 최고의 문벌귀족인 인주 이씨 이자겸의 전횡으로 왕권이 약화된 상황에서 급기야는 이자겸이 난을 일으켜 인종은 척준경을 이용하여 이자겸을 제거하고 이후 중앙정계는 김부일ㆍ김부식 등 경주 김씨 일가가 장악하게 된다.
인종은 서경에 오랜 기간 체류를 하게 되는데 이는 서경이 그의 안식처로서 적당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왕권에 부단히 제약을 가져오는 문벌귀족들이 득실거리는 개경이 싫어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더구나 당시의 서울인 개경은 이자겸의 난으로 많은 궁궐이 소실되고 아름다웠던 도성은 잔해만 남아있었다.
또한 동아시아의 역사는 10세기 이래 커다란 변혁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당이 망하고 얼마 안 가서 송이 그것을 대신했지만, 한민족을 중심으로 한 세계 제국적 지배질서가 붕괴되고, 제국의 내부 및 주변의 민족이 각각 독자적인 움직임을 개시했다.
대외관계에 있어서 진취적인 입장을 보여 왔던 고려는 고구려의 고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거란이 만주대륙을 차지하며 남방을 견제하여 고려는 건국 초부터 북방민족과 숙명적 대항관계에 서게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