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중국사회에 있어서 토지사유제의 출현과 성장
- 최초 등록일
- 2006.04.27
- 최종 저작일
-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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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수님 논문을 보고 서평한 글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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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신석기 시대에 생활수단이나 생산도구의 사유제는 있었지만 아직까지 토지는 사유제가 미치지 않았고 또 필요도 없었다. 화전농업의 형태가 대부분이었고 인구도 적어 대량의 처녀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제농구의 사용이 시작되고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향상되면서 일정한 지역에서의 장기간 경작을 통한 정착생활이 시작되어 토지사유제가 서서히 출현하게 되었다. 토지사유제는 철제농구가 등장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불안정한 형태로 출현, 인구증가와 철제농구의 사용이 보편화된 춘추시대에 맹아적 형태로나마 출현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논문에 인용된 <<좌전>>에서나 불공평한 토지분배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는 맹자의 주장에서 춘추전국시대에는 이미 토지사유제가 어느 정도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춘추중기에 접어들면서 열국간의 경쟁은 더욱 뜨거워졌고 토지관계의 개혁을 군사와 맞물려 추진하는 등의 농업과 관련된 공통적 개혁을 단행,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었다. 전국시대에는 각국이 경쟁적으로 단행한 변법이 부국강병을 위한 물적토대를 마련하는데 그 초점을 맞추었고, 국가가 개간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농업발전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러한 각국의 토지획득은 전쟁을 야기시키는 주요원인이 되었으며 개혁이 가장 성공한 진이 마침내 중국을 통일한 것도 결코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상양의 수전체제는 반드시 국유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역사의 흐름인 사유화를 역행하려는 것이 아니라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위해 적극적으로 토지를 개간하려는 움직임에 불과하였다. 변법 역시 생산력 확대와 군사력 증강을 위한 부국강병의 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토지사유제는 늦어도 춘추시대 말기까지는 출현했던 것이 확실하며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전한 초기에 이르러 완전히 제도적 정착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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