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행정론] 다핵형의 대구광역시의 구조연구
- 최초 등록일
- 2004.12.06
- 최종 저작일
- 2002.11
- 9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500원
소개글
도시행정론 리포트입니다.
대구광역시에 대해서 샅샅히 조사한 겁니다.
필요하신 분 받아가세요.
목차
1. 서론
2. 대구광역시의 역사
3. 대구광역시의 일반현황
4. 대구광역시의 조직구조
5. 대구광역시의 상징물, 캐릭터
6. 대구광역시의 시정방향
7. 대구광역시의 발전과제
8. 대구광역시의 특징
9. 결론
본문내용
3. 大邱廣域市의 高麗時代
고려시대(高麗時代) 대구지역은 후삼국의 혼란기에도 신라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로 인식되어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어 역사상 유명한 동수대전의 격전지가 되기도 하였다.
동수대전은 고려를 세운 왕건과 후백제 견훤과의 싸움이다. 927년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침범해 오자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이 신라를 도우러 경주로 가던 중 동수(동화사 인근지역)에서 만나 일대 격전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왕건군은 크게 패하여 왕건의 생명조차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때 왕건의 심복장수인 김락의 호위를 받은 신숭겸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으로 위장하고 달아나자 견훤군이 신숭겸을 쫓아 몰려가는 바람에 군졸로 변장한 왕건은 무사히 위기를 모면하였다.
왕건은 그 뒤 자신을 대신하여 전사한 신숭겸장군과 김락장군을 위하여 지묘사(智妙寺)를 지어 위로하였는데, 지묘사는 후일 없어지고 말았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대구에는 왕건에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게 되었다. 즉 왕건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는 파군재(破軍재), 왕건의 탈출로를 비추어 주던 새벽달이 빛났던 반야월(半夜月), 왕건이 혼자 앉아 쉬었다는 독좌암(獨坐巖) 등을 비롯하여 앞산의 은적암(隱蹟庵), 왕정(王井) 등은 이 싸움에서 유래한 지명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고려초기의 대구지역은 수성군, 대구현, 해안현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대구현은 수성군에 영속되어 있었고, 해안현은 장산군(현 경산)에 영속되어 있었다.
1143년(인종21년)에 대구현은 현령관으로 승격되면서 점차 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고 또한 12세기 후반 무신의 난이 일어난 뒤 대구 부근의 청도, 밀양, 경주 등지에서 민란이 빈발하자 대구는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사활동의 큰 거점이 되었고, 몽고 침입기에는 팔공산 부인사가 대장경판과 더불어 소실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4. 大邱廣域市의 朝鮮時代
조선시대(朝鮮時代) 조선이 세워진 후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대구는 농업의 중심로서 인구가 점차 증가하였으며, 1394년(태조3년)에 대구현이 수성현과 해안현을 영속하여 확장 발전됨에 따라 1419년(세종1년)에는 대구군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http://www.daegu.go.kr/
http://www.universiade-daegu.org/
http://envi.daegu.go.kr/agenda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