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19세기 중국의 변화와 개혁운동"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阿片戰爭 전후의 정치 상황
Ⅲ. 洋務運動
Ⅳ. 變法運動
Ⅴ.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19세기 중엽, 청은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의 서양 세력에 비해 청은 근대화된 군사력을 가지지 못했기에 그들의 침략은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수정주의적 견해들은 중국 근대적 변혁의 획기로서 아편전쟁의 의미를 새롭게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18세기나 혹은 그 앞 시기에 시작되어 19세기와 20세기의 중국 사회에까지 지속된 내적 변화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희제(康熙帝, 1661~1722), 옹정제(雍正帝, 1722~1735), 건륭제(乾隆帝, 1735~1796) 3대 130여 년 동안 청은 전성기를 누렸다. 내외적인 정책과 성과로 인구는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전례없는 인구 증가와 더불어 영토팽창, 도시화와 상업화, 신사층의 역할증대 등 서구충격 이전에도 의미 있는 변화들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렇듯 중국의 18세기는 태평성대의 시대였다.
그러나 건륭제가 죽은 후 폭로된 건륭제의 총신 화신(和珅, 1750~1799)의 부패로 인해 중국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이에 가경제(嘉慶帝, 1796~1820)는 황제 등극 이후 화신 일당을 처리하기 위해 힘썼다. 1799년 11개의 주요 총독(總督) 중에 6명을 교체하고 한족 관리를 적극적으로 등용하였다. 하지만 화신 일대를 모조리 일소하지 못하였다. 또한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지 못하였고 경직된 권력구조와 무기력·기강의 해이와 도덕 불감증이 자리잡고 있었다.
1840년에 발발한 아편전쟁 이후 본격화된 서양문명의 충격은 중국 사회 내에서 근대적 변혁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였다. 더불어 아편전쟁 이후 일어난 중국의 변화는 이전부터 지속되어 온 중국 사회 자체 내의 변화와 서양에 의해 제공된 외래적 변화 요인의 결합의 산물이었다.
함풍 8년(1858)부터 함풍 10년(1860)에 걸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침략으로 북경이 점령당하자 서양세력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청조의 권력은 이른바 유경파(留京派)와 열하파(熱河派)로 분열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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