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의 왕권강화
- 최초 등록일
- 2017.12.23
- 최종 저작일
- 20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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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Ⅱ-1. 고려 제4대 왕 ‘광종’
Ⅱ-2.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
Ⅱ-2-1). 칭제건원
Ⅱ-2-2).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
Ⅱ-2-3). 관복제정
Ⅱ-3. 왕권강화의 결과, 공포정치의 시작
Ⅲ. 결론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고려사에서 광종(光宗, 925~975, 재위 949~975)은 어떤 왕이었을까.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 관복 제정 등 왕권 강화를 위해 그가 이룬 정책들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고 중요한 업적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재위 중반부터 시작된 공신과 왕실에 대한 피의 숙청 때문일 것이다. 고려 성종 대 이후 유학자들은 광종을 평가하는데 인색하였다. 당대의 유학자 최승로나 고려 말의 이제현, 그리고 도의를 중시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 비친 광종은 참소)를 좋아한 왕이었고 광기의 왕이었다.
Ⅱ. 본론
Ⅱ-1. 고려 제4대 왕 ‘광종’
광종은 흔히 왕권강화를 위해 힘쓴 왕으로 잘 알려졌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호족의 힘이 필요했고, 이 때문에 개국공신은 3,200명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개국공신들은 나라를 건국할 때는 한편이 되지만, 건국 이후에는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나라를 세운 왕에 이어서 공신들을 제거하여 왕실과 나라를 지키는 수성의 군주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광종은 고려왕조의 수성 군주였고, 이를 위해 피의 군주가 되기를 자청하였다.
949년 정종의 뒤를 이어 고려 제4대 왕이 된 광종은 태조의 3남(확실하지는 않다)으로 이름은 왕소이다. 3대 왕 정종의 친아우이며 태조의 세 번째 부인인 신명순성왕후 유씨 소생이다. 신명순성왕후는 충주를 대표하는 호족 유긍달의 딸로 태조의 부인들 가운데 가장 자식을 많이 낳은 왕후이다.
충주를 외가로 한 광종은 형인 정종보다 정치적 세력이 더 막강하였다. 그 배경에는 황주를 기반으로 한 대목왕후 황보씨의 탄탄한 후광이 있었다. 광종은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 부인인 대목왕후 황보씨는 신정왕태후와 태조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광종은 이복누이와 결혼하였지만, 이로 인해 막강한 호족세력을 얻었다. 또 다른 부인인 경화궁부인 임씨는 2대 왕 혜종의 맏딸로 광종에게는 조카가 된다.
참고 자료
이야기 한국역사, 풀빛
위키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