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자, 한미관계 - 한·미 FTA를 중심으로 -
- 최초 등록일
- 2015.07.25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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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미 FTA를 중심으로 한미관계를 정리한 리포트입니다.
많은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5공 이후 한미관계와 한미FTA
3. 한미FTA 찬성과 반대
4. 투자자 국가소송 제도(ISD)
5. 나오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한·미 FTA 비준안이 드디어 국회에서 통과됐다. 2006년 양국이 협상을 시작한 지 5년 만에 역사적인 한·미 FTA 발효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한·미 FTA 비준은 우리 경제 선진화를 한 단계 높이는 역사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유럽발 재정위기로 글로벌 경제 침체가 염려되는 현시점에서 악영향의 의미도 남다르다.
한·미 FTA는 그 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양국이 비준에 이르는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미국 통상정책 기조변화로 사장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고 협성 초기부터 비준이 완료될 때까지 국내 정치계 내부에서도 밥그릇 싸움을 연상케 하는 대립각이 나타났다. 양국과의 국익 발전을 위해 과연 한·미 FTA는 필요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거대 미 제국주의의 자본 흔들기로 인한 대한민국의 종속 신드롬인가에 대해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다음 차례에서 한미관계를 간략히 검토하고 FTA는 무엇인지를 시작으로 본 글을 진행하겠다.
2. 5공 이후 한미 관계와 한미 FTA
- 정부별 관계
1) 5공화국
제5공화국은 전 정권에 이어 친미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하여, 한국에 있어서 미국은 혈맹관계라고 지칭될 만큼 전통적인 우방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학생들의 반미주의 운동을 조장한 측면도 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위해 군대가 투입되었다. 당시 평시 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사령부에 있어서 미국의 승인 없이는 군대의 자유로운 이동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를 알고서도 묵인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형성되었고, 이는 1982년 3월의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시작으로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등을 통해 학생·재야에서는 반미운동이 가속되었고 정부 간에는 통상마찰이 심화되어 급기야 국민적 갈등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