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와 민족주의] 단군신화의 내용, 단군신화에 대한 시대적 인식, 단군신화의 분석, 단군신화의 민족주의
- 최초 등록일
- 2015.05.11
- 최종 저작일
- 20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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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단군신화와 고조선
1.1. 고조선 국가로의 발전
(1) 고조선의 형성
(2) 국가로의 출발
(3) 고조선의 구조
2. 단군신화의 시대적 인식 변화
2.1. 고조선에서 통일신라기까지의 인식
2.2. 고려시대의 단군인식
2.3. 조선시대의 단군 인식
(1) 조선시대의 배경
(2) 단군 종교의 등장
2.4. 일제시대의 단군인식
(1) 일제시대의 고유신앙
(2) 일제시대 단군신화에 대한 견해
3. 단군신화의 실상
3.1. 시기의 오류
(1) 기록연대와의 차이
3.2. 내용의 허구성
(1) 등장인물들의 실상
(2) 단군신화의 실상
① 내용의 실상
4. 단군신화와 민족주의(고조선과 민족주의)
4.1. 국사교과서에 나타난 단군신화와 민족주의
5.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고조선의 국가로의 발전이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다. 기원전 1000년기 전반기부터의 비파형동검문화의 발전과 고조선의 국가로의 발전은 동일한 궤도를 밟았을 것으로 보인다. B.C 4세기 후반이나 3세기 전반에 왕이라는 호칭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이때 쯤이라 추정은 가능하다.
또한 중국 연나라와의 무력 충돌 꾀하였다. 이는 고조선 사회가 이미 상당한 정치적 발전을 이루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점에서 국가로서의 출발은 이보다 이전에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 략>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바로 단절되다 시피 한 단군신화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고려는 자신의 통일 과업 달성을 통일신라에 이어 삼한(고구려, 백제, 신라)일통의식으로 강조하였지만, 실제 역사계승의식에서는 삼국 각각의 특색이 그대로 존재하였다.
그렇지만 일부에서는 단군에 대한 전승이나 신앙이 꾸준히 전해져 왔던 것 같다. 황해도 구월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단군을 비롯한 환인, 환웅이 3성(三聖)으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어 그들을 제사지내기 위한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단군과 고조선이 또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고기(古記)」에 “白岳山阿斯達”이라 하여 아사달을 백악산에 비정하고, 일연도 단군이 도읍으로 삼고 후에는 산신으로 머물렀다는 아사달을 백악에 비정하였다.
<중 략>
국사교과서에서는 현재의 ‘우리’가 단일민족이라고 칭하며 그 기원을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보는 ‘단군’에서 찾는다. 부여나 옥저, 동예 등 부족국가에 대한 서술에서는 ‘우리’라는 단어사용이 거의 없는 반면에 고조선 영역에서는 유독 ‘우리’가 강조 되고 있다. 삼국유사에 나타난 단군신화는 역사적 사실로 서술하고 있으며 고조선의 건국의의는 현대에까지 이르러 오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모든 교과서가 고조선을 청동기 문화에 토대를 두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국가로 서술하고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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