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秦)나라와 중국의 역사적 흐름
- 최초 등록일
- 2013.06.04
- 최종 저작일
- 2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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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건국 이야기
2. 역사적 사실
3. 정치 체제
4. 멸망 원인
5. 일단 춘추전국시대부터 이미 3개의 진나라가 존재.
6. 역사적 흐름
본문내용
1. 건국 이야기
BC 10세기 목축으로 이름이 나 있던 대구(大丘)의 비자(非子)는, 주 나라 효왕(孝王)으로부터 진읍(秦邑)에 봉해져 서융(西戎)의 방위를 맡음으로써 진 나라를 일으켰다.
그 후 진 나라는 BC 8세기 초, 주 나라가 견융(犬戎)의 공격을 받을 때 유왕(幽王)을 도왔고, BC 771년에 평왕(平王)이 동쪽 낙읍(洛邑)으로 천도하였을 때에는 이를 호위한 공으로 산시성[陝西省]의 서부 지역을 맡아 제후(諸侯)로 승격하였다.
훗날 진시황제(정)이 한비자의 법가 사상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 중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잦은 부역과 사상 탄압 등으로 2대 단명 왕조(진시황제 통일을 기준)로 끝을 보게 됩니다.
2. 역사적 사실
[춘추 시대의 진 나라]
BC 659년에 이르러 진(秦) 나라 목공(穆公)은 백리해(百里奚), 건숙(蹇叔) 등의 인재를 등용해 정치를 혁신하고, 동쪽의 진(晉) 나라와 싸워 하서(河西)의 땅을 빼앗았다.
또한 서융 출신의 유여(由余)를 등용, 서방 이민족의 12국을 통합하였으며, 영토를 1,000리에 이르도록 확장하여 서방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이때, 주나라 황실에서는 동고(銅鼓)를 하사해 경축하였다 한다.
그 후 하서 땅은 다시 진(晉) 나라에 빼앗기는 등 진(秦) 나라의 당면한 적은 진(晉) 나라 였으므로 초(楚) 나라와 손을 잡고 빈번히 진(晉) 나라와 싸웠다.
진 나라는 무공(武公)에서 목공(穆公) 때에 걸쳐 산시성 내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관중(關中)의 땅을 통일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