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정착설
- 최초 등록일
- 2013.05.27
- 최종 저작일
- 2013.04
- 3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가나안의 사회적·정치적·종교적 상황
Ⅲ.3가지 정착설
1.무력 정복설
2. 이주설
3. 농민혁명설
Ⅳ.맺음말
본문내용
Ⅰ. 들어가는 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단강 동편으로부터 그 땅으로 들어가서 신적인 개입의 도움을 힘입어 여리고를 정복하고 군사작전을 통해 나머지 가나안 지역을 차지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여호수아10:40) 이와 같은 성서 내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다른 방법으로 가나안을 획득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지만, 이에 대한 또 다른 견해가 사사기에 나온다. 사사기 1장에서는 가나안의 중부 산지에 발판을 마련하려는 지파들과 그 관련 지파들이 수행한 산발적인 전투를 묘사하고 있고, 원주민들이 새로운 주민들에 의해 쫓겨나지 않은 20개 도시 목록으로 끝나고 있다. 이와 같은 성서내부의 불일치와 사회문화적 배경과 더불어 역사비평적인 방법론에 의한 성서해석학의 대두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이주, 혁명설과 같은 다른 견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Ⅱ. 가나안의 사회적·정치적·종교적 상황
가나안 지방은 북쪽의 갈릴리 호수로부터 시작해서 요단강을 거쳐 남쪽의 사해에 이르는 중앙회랑지역이 전체 가나안의 유일한 수원지가 되고, 이곳을 중심으로 동과 서로 뻗힌 건조한 고지대가 펼쳐진다. 그러나 이 중앙회랑지역의 수원지마저도 농업용수로 끌어다 대기에는 부족할 뿐 아니라 염분이 있는 물이어서 농경에는 부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가나안 지방은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형태보다는 오아시스, 샘, 분지들을 중심한 성읍국가적인 권력 형태를 위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형성기에 가나안 지방은 이집트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이집트는 가나안 땅을 직접 다스리지 않고 봉건제도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가나안에는 각 지방마다 이집트의 관습을 받는 정부가 있었다. 이것은 가나안이 통일 연합체로서 되는 것을 방지하는데 큰 효과가 있었다.
당시 가나안 사회는 근본적으로 봉건적이어서 대부분의 토지는 군주의 하사품이었다. 토지는 군주, 관리들, 군사 귀족, 기타 특수층에게 하사되었고, 이들은 왕과 특별한 충성관계를 이루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