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위인 유성룡
- 최초 등록일
- 2012.06.19
- 최종 저작일
- 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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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위인 유성룡에 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개요
2. 관직
3. 가축옥사때 자혁
4. 임진왜란 대비
5. 학문과 저술
6. 주요 유적지
① 충효당
② 병산서원
본문내용
1. 개요
유성룡은 의성출생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본관은 풍산이고 자는 이견, 호는 서애이다. 공작의 손자로, 황해도관찰사 중영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의 딸이다. 그리고 이황의 문인이기도 하다. 김성일과는 동문수학하였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1542년에 출생해서 1607년에 생을 마쳤다.
2. 관직
유성룡은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1568년(선조 1) 대교, 다음해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를 하였다. 그뒤 정언·병조좌랑·이조좌랑·부교리·이조정랑·교리·전한·장령·부응교·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중 략>
4. 임진왜란 대비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형조정랑 권율과 정읍현감 이순신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으며, 경상우병사 조대곤을 이일로 교체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1592년 3월에 일본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위사를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 일본사신은 그대로 돌아갔다. 그해 4월에 판윤 신립과 군사에 관하여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다.
4월 14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뒤 충청·경상·전라 삼도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으며, 이여송이 벽제관에서 대패하여 서로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권율과 이빈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