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의 영웅
- 최초 등록일
- 2012.03.07
- 최종 저작일
- 2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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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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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2. 견훤(甄萱), 서남해의 영웅
3. 궁예(弓裔), 혼란기의 미륵불(彌勒佛)
4. 왕건(王建), 새 시대를 연 사람
5. 세 인물의 비교, 결론
본문내용
후삼국의 영웅
1. 들어가며
신라 말기는 한국사에서 큰 획을 그을 정도로 중요한 시기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사회는 극도로 혼란했다. 중앙에서는 진골 귀족들이 왕위다툼을 벌이고 있었고, 지방 각처에는 호족들이 중앙의 혼란을 기회삼아 그곳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귀족들과 사찰의 대토지 소유로 인해 백성들은 유민(流民)이 되었고 그들은 정부에 대항하여 봉기하게 된다. 이 봉기는 급속도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는 북원(北元, 원주)의 양길(梁吉), 죽주(竹州, 죽산)의 기훤(箕萱), 완산(完山, 전주)의 견훤(甄萱)세력 등이었다. 이들 세력은 9세기 말과 10세기 초에 두 개의 커다란 세력으로 정리된다.
서남해(西南海) 방위에 공을 세워 그 지역의 비장(裨將)으로 있던 견훤은 진성여왕대의 혼란한 틈을 타 무진주(武珍州 : 광주)를 비롯한 여러 성을 점령하였다 900년에 완산에 도읍을 정하여 후백제(後百濟)를 건국한다. 그는 후삼국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지만 내분에 의해 몰락하고 결국엔 고려에 투항한다. 935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신라의 왕족 출신이었던 궁예는 왕실에서 쫓겨나 10세에 영월의 세달사(世達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혼란기에 그는 절을 떠나 죽주의 기훤에게 있다가 후에 양길의 수하에 들어간다. 양길의 수하에 있었던 그는 원주, 영월, 강릉, 화천, 철원 지역을 얻은 후 양길을 떠나 독자적 세력을 형성한다. 왕건(王建)부자의 투항이후에 양길세력을 격파하고 901년 후고구려(後高句麗)를 건국한다. 초기에는 선정(善政)을 펼쳤지만, 집권 말기에 강압적이고 전제적인 정치로 인해 민심을 잃게 된다. 이에 왕건과 그의 사람들이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에 고려(高麗)를 건국한다. 내·외부로 온건적인 개혁을 취하고 백성들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정책을 취하였던 왕건은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제일 늦게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던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했다는 것은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견훤과 궁예는 그
참고 자료
?강만길 외. 『한국사』5권 - 중세사회의 성립. 서울 : 한길사, 1994.
?김산호. 『대쥬신제국사』4권 - 북방제국의 흥망성쇠. 서울 : 동아출판사, 1995.
?인터넷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http://www.britannic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