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
- 최초 등록일
- 2012.01.06
- 최종 저작일
- 2010.05
- 11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일본사회의 이해 시간에 다루었던 위안부 문제를 정리해놓은 자료입니다.
목차
1. 위안부 문제의 시발
1) 전후의 삶
2. 진상규명과 배상을 위한 움직임
3. 일본의 대응
4.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한, 일 양국의 입장
1) 일본군위안부 배상에 대한 한, 일 양국의 공식 입장과 견해
5. 국제사회의 반응
6. 반박 자료
1) 일본의 사과
2) 전쟁의 폐해
7. 시사점
본문내용
1. 위안부 문제의 시발
일본은 만주사변(1931년)과 중일전쟁(1937년 발발)으로 전선이 확대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늘어나는 주민 강X과 성병을 막고 군의 사기를 진작한다는 명목 하에 ‘군위안부’ 제도를 만들었다. 일본군이 군 위안소를 만든 시기는 1932년경이며 본격적으로 설치한 것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말부터이다. 일본군은 위안소의 설치 목적, 관리감독, 위안부 동원에 대한 명확한 원칙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실행했다. 일본, 한국,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많은 여성들이 은밀하면서도 체계적으로 군위안부로 동원되었다. 총 숫자는 적게는 5만 명에서 많게는 수십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당시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수가 동원되었으나 정확한 숫자는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끌려간 여성들의 나이는 10대 초반부터 40대까지 광범위했다. 가난한 집안의 여성들이 식당종업원, 간호사, 여공 모집 등 취업사기에 속아 끌려갔으며, 유괴나 강제 연행 형식으로 끌려간 경우도 많았다. 일본군이 직접 나서거나 군의 협조 하에 민간인이 동원을 담당하였다. 끌려간 여성들은 열악한 군위안소에서 치욕적인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 위안소는 군부대 주둔지 근처에 별도의 건물로 들어서거나 군용 막사나 트럭이 이용되기도 했다. 서너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의 위안부가 같이 생활하는 위안소는 변변한 위생시설조차 갖추지 않은 열악한 환경이었으며, 피해 여성들은 인권을 유린당한 채 소모품 취급을 받았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