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 진위 논란에 대해서
- 최초 등록일
- 2011.10.07
- 최종 저작일
- 2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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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화랑세기 진위 논란에 대해서
목차
1.화랑세기 진위논란배경
2.초록본과 모본의 관계
3.진위논란의 여러주제들
4.화랑세기(필사본)의 가치와 위치
5. 맺음말
본문내용
1. 화랑세기 진위논란 배경
화랑세기(花郞世記)는 김대문에 의해 저술된 신라시대 화랑도의 우두머리인 풍월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신라 성덕왕의 재위기간 사이에 쓰여졌다. 《화랑세기》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서술할 때까지 남아 있었으나 이후 소실된 것으로 생각되어왔다. 1989년 2월에 남당 박창화가 일본 천황가의 보물창고인 쇼소인에서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화랑세기》 한문 필사본(초록본)이 김해에서 발견되었다. 1995년에는 162쪽 분량의 또 다른 필사본(모본母本)이 발견되었다. 이 필사본에는 서기 540년부터 681년까지의 풍월주 32명의 전기가 담겨 있다. 필사되었다고 주장되는 《화랑세기》는 유교적인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은 신라인의 신라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 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지만, 현재까지 박창화가 필사한 원본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위작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화랑도의 구체적인 구조 및 진골정통, 마복자 등 신라 사회에 대한 새로운 기록을 많이 전하고 있다. 문화방송 드라마 《선덕여왕》도 이 필사본을 소재로 삼고 있다
2. 초록본과 모본의 관계
- 만약에 발견된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본이라면, 후에 발견된 모본이 지닌 가치는 초록본에 비할바가 되지 않을 것이다. 박창화가 모본외에 따로 초록본을 만든 이유를 파악한다면 더욱 진위를 가리는 것이 쉽게 흘러갈 것이다.
1) 진서론 주장
- 초록본과 모본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필사자였던 박창화의 개인적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일본 궁내성 서릉부에 있는데 그곳에서 근무하였던 박창화가 그것을 일인들의 감시를 피해 단 시간에 그 뼈대만 몰래 베끼어 조선종이에 정서하여 만들었는 것이 초록본이고, 도쿄 대폭격 때 자료의 망실을 대비해 화랑세기 전체를 급히 베낀것이 아닐까 라고 추정, 그리고 박창화는 한학을 깊이 공부한 유학자로서 유가적 체취가 전혀없는 분방한 성관계 기사가 중심이 되는 필사본 화랑세기를 위작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고 하였다.(김학성 교수)
- 박창화가 모본에는, 김대문의 화랑세기의 내용에서 나오는 私通·通情관계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워 유교적 윤리에 어긋나는 내용을 담은 부분을 뺀 초록본을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종욱 교수)
참고 자료
노태돈, 筆寫本_花郞世紀는_眞本인가, 한국사연구회. 한국사연구
노태돈,「花郞世紀」의_史料的_價値, 역사학회, 역사학보
이영훈,《화랑세기》에서의 노와 비 -삼국시대 신분제 재론-, 역사학회, 역사학보
이도흠. 필사본 『화랑세기』의 사료적 가치에 대한 국문학적 고찰, 국제어문학회, 국제어문
이종욱, 『화랑세기 (花郞世記)』의 신빙성과 그 저술에 대한 고찰, 역사학보
이근우, 『화랑세기』에_대한_통계적_접근, 역사학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