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 최초 등록일
- 2010.05.23
- 최종 저작일
-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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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입당구법순례행기의 내용과 의미
목차
Ⅰ. 머리말
Ⅱ. 9세기 동아시아 세계의 상황
Ⅲ. 원인의 생애와 입당구법순례행기
1. 원인의 생애
2. 입당구법순례행기
Ⅳ.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의미
Ⅴ. 맺음말
본문내용
가. 입당구법순례행기 권 제1
838년 6월 23일 원인은 우쿠시마에서 당에 가고자 신라인 통역관인 김정남(金正南)과 함께 출항하였다. 여러 고생을 겪은 후 높은 파도에 의하여 배가 파손되고 지나가던 작은 창선 한척을 만나 일본에서 가져온 국신물을 싣고 다시 배를 타고 이동했다. 그리하여 양주 해릉현 백조진(白潮鎭) 상전향(桑田鄕) 동량풍촌(東梁豊村)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피곤을 풀면서 양주로 향할 준비를 하였다. 방선을 타고 운하를 통해 출발한지 두 달여 만인 7월 25일에 양주에 도착하였다.
이 곳에서 양주대도독부의 이상공을 만나 태주에 국청사를 가기위한 공문서를 보낸다. 허락의 명이 떨어질 때까지 개원사에서 머물도록 해주었다. 여러 노승들을 만나고 개원사의 묘견보보살과 사천왕상을 그리는 작업을 하였다. 그 이후 천자가 어떤 사람의 참언으로 황태자를 죽이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천자의 구리 사용 금지 칙령이 내려져 전국적으로 그 매매가 허용되지 않기도 하였다.
11월 27일에 동지날이 있어 당나라의 예에 맞추어 보내고 한해를 넘기고 입춘이 지나고 한식을 맞이하여 3일간 연기를 내지 않는 것도 보았다. 천태산까지의 순례를 위해 당정부에 허락을 신청하지만, 발급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2월 21일 조공사일행을 찾아 초주로 출발한다. 초주에 가서 조공사 일행을 만난 후 귀국을 준비하기 위하여 신라인 통역관 김정남을 통해 9척의 신라선과 바다 길에 익숙한 신라선원 60여명을 고용하여 귀국하려 하였다. 그러나 원인은 김정남과 의논하여 몰래 밀주에 숨어 있다가 천태산으로 향하고 아울러 장안을 가기로 결정한다. 운 좋게 목탄을 수송해 가던 우호적인 신라상인들을 만나 그들의 안내로 20여리 떨어져 있는 신라인 마을인 숙성촌(宿城村)으로 안내되었다. 이곳에서 신라인이라 거짓으로 말하고 2-3일 기숙을 청한다. 그러나 촌장 왕량(王良)은 이들이 일본인임을 간파하고 유숙을 거부한다. 때마침 마을에 와 있던 순찰병을 만나 다시 조공선으로 환송된다.
배 위에서 생활을 하면서 바람이 제대로 불지 않아 많은 어려움이 있어 순풍이 불기를 바라는 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김문경, 2001, 『入唐求法巡禮行己』, 중심
최근식, 2006, 『신라해양사 연구』, 고려대학교출판부
李侑珍, 2001,「9世紀 在唐新羅人의 活動에 대하여-『入唐求法巡禮行己』를 中心으로-」, 『中國史硏究13』, 中國史學會
下麟錫, 1994, 「圓仁의 『入唐求法巡禮行己』에 나타난 ‘本是新羅人’에 관한 考察」, 『東方學志 185』,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