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있어서의 역사서술
- 최초 등록일
- 2010.02.01
- 최종 저작일
-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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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병익 교수님의 논문 레포트입니다.
목차
1. 撰述의 涇渭
2. 論贊
3. 捏造·刪削
4. 삼국 각국에 대한 자세
5. 結 言
본문내용
우리가 현유(現有)하는 최고(最古)의 사적(史籍)인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중국·일본의 최고 사적에 비해서는 훨씬 늦은 시기인 고려 인종 23년(1145)에 김부식(金富軾, 1075 ~ 1151)에 의해서 완성되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이렇게 만출(晩出)된 사서이니만큼 그간의 역사기술의 발전이 여기에 반영됨으로써 내용·체제가 갖추어질 것이 생각될 수 있지마는, 또한 서술 대상 시대에서 멀리 떨어지게 됨으로 해서 상세를 결(缺)하고 정확하지 못한 점이 많을 것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대해서는 종래로 여러 가지 비평이 많았으며, 그 대부분은 부정적 비판으로 종시(終始)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지나친 유가윤리(儒家倫理)와 중국 중심의 사상에 사로잡혀서 건조하고 왜곡된 역사상(歷史像)을 심었다는 비평을 들어왔다. 또한 일제이후의 여러 연구자들 역시 그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에서 나온 비판이 아니었으며, 대개 중국문헌의 전재(轉載)라든가 또는 사대적(事大的)인 악서(惡書)라고 몰아쳤던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삼국사기』의 찬술(撰述)에 따른 몇 가지 구체적인 문제들을 다루어서 『삼국사기』의 성격을 구명하고 아울러 이런 비평의 타당성 여부를 고찰하려 한다.
1. 撰述의 涇渭
『삼국사기』도 다른 여러 사서와 마찬가지로 군왕(君王)의 명령에 의해서 찬술된 사서이다. 인종의 명에 의해서 엮어진 칙찬(勅撰)의 사서이므로 순전한 개인저술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해야 한다.
군왕의 명을 받아서 찬술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한 가지는 혼자서 집에 들어앉아 저술하는 것이요, 또 한 가지는 정부 속의 편찬기관을 이용해서 여러 사람의 협력을 얻어서 편찬하는 방식이다. 당대(唐代) 이후의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의 정통적 왕조사의 편찬은 말할 것 없이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김부식은 감수국사(監修國史)의 지위에서 편찬사업의 총재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래서 완성과 더불어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를 인종에게 올리고 관례대로 그 노고에 대한 상사(賞賜)를 받았으며 『삼국사기』의 권말에는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편수 김부식을 비롯해서 11명이 열기(列記)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편찬도 일종의 사관제도(史館制度) 아래에서 수행되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1. 사료
『고려사』, 신서원, 1992
2. 단행본
신형식, 『삼국사기연구』, 일조각, 1993
3. 학술지논문
이재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타난 국가의식」, 『부산대논문집』10, 부산대학교, 1969
이기백, 「삼국사기론」, 『문학과 지성』26, 문학과 지성사,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