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약전골목 현장답사 레포트
- 최초 등록일
- 2009.12.22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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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구 약전골목과 영남대교를 현장답사하여 사진자료와 함께 약전골목과 영남대로의 지리적 입지 측면에서 작성한 레포트 입니다.
목차
◎ 조사한 내용
▶ 약령시의 역사
▶ 대구 약령시의 지리적 입지 요인
▶ 대구약령시의 역사적 의의
▶ 약령시의 현재
▶ 약령시의 명물
▶ 영남대로의 역사
▶ 영남대로의 현재
◎ 느낀 점
본문내용
◎ 조사한 내용
▶ 약령시의 역사
조선 시대 때 우리나라에는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서울에는 활인서나 혜민서 등 민생구제를 위한 시설이 있었지만, 지방에는 그러한 국가 시설이 없었다. 그래서 효종 9년에 여러 지방에 약령시를 개장해서 약재를 판매하고 일부는 조공으로 바치게 하였다. 이 때 대구의 약령시가 탄생되었다. 당시 대구약령시는 봄에 열리는 춘령시(음력 2월)와 가을에 열리는 추령시(음력 11월)로 1년에 2번, 1달씩 열렸다고 한다. 조선 8도를 포함한 중국과 만주, 러시아, 인도는 물론 유럽 등 세계 각지로 부터 각종 약재와 약재상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대구약령시가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 조달과 연락의 거점이 되고, 국권회복운동을 직,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제에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다. 그래서 1914년에는 춘령시가 폐지되고, 1941년에는 추령시마저 폐지되었다. 그 이후로 대구약령시를 부활시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있었으며, 그 일환으로 약령시축제, 약령시 전시관 개관, 한방특구 제정 등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 대구 약령시의 지리적 입지 요인
낙동강이라는 수운을 끼고 있었고, 지리산, 가야산, 소백산, 태백산지에서 모여드는 우수한 약재 채집이 쉬웠다. 또한 경상감영이 대구로 이전해옴에 따라 대구가 행정중심도시가 되고, 상업자본이 축적되었다.
▶ 대구약령시의 역사적 의의
대구약령시는 그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시작부터 민생의 혼이 담긴 민족문화의 보고이다. 선조들의 소중한 생업이 이어진 공간이고, 민족의약의 전승 공간이며, 일제 시대 민족의식을 고양시킨 한방문화의 전승 공간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