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념, 이이의 변통론(變通論), 김장생의 예학(禮學)등 기호학파의 학문 전통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 예학은 에티켓이 아니라 신분제를 지탱한 핵심 법률이며, 우암이 그토록 예학을 강조했던 까닭은 흔들리는 신분제를 확고히 함으로써 사대부 및 그의 당을 지키고자 했던 몸짓이었을 뿐이라고 ... 송시열의 사상과 그 정치적 적용 우암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나, 조광조, 이율곡 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그의 스승인 김장생과 더불어 송시열은 예학의 태두로 불린다. 조선성리학의 흐름을 예학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 그러나 송시열은 조선성리학의 흐름을 예학으로 바꾼다. 각 신분에 따라 지켜야 할 행동규범을 뜻하는 예학은 사회 변화를 저지하는 수구적인 사상이다. ... 조선성리학의 주류가 예학으로 변화한 것은 성리학이 사회 변화를 저지하는 보수적인 사상으로 퇴화했음을 의미한다.
송시열의 스승인 사계 김장생은 예학을 조선 성리학의 주류로 만들었고 예학은 훗날 서인과 남인 사이의 두차례의 예송논쟁을 유발한다. ... 송시열은 이이-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진 기호학파를 계승한 정통기호학파였다. ... 효종과의 만남 (1635년) 송시열은 율곡의 학통을 이은 김장생의 문인이라는 점과 지방을 장악하고 있는 유학자라는 점을 인정받아 대군사부가 되어 조정에 진출하는데 이때 그의 인생에
기호학파는 사단칠정론 등의 성리설과 예학 등에서 많은 학문적 성과를 남겼는데, 특히 송익필·김장생·송시열 등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예학은 현종대에 남인과 맞서 극렬한 예송논쟁을 일으키게 ... 이처럼 성리학을 공부한 많은 학자들이 충청지방에서 자신의 사상과 논쟁을 펼쳤으며 이는 우리나라의 예학인 충청지방에서 발전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2.2.5 충남 도정 100년
대표자로는 정구, 김장생, 김집, 정경세, 유계, 박세채 등이 있다. 이들 모두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던 것이다. ... 이제 조선의 유학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이후 조선 유학은 학문적 주류였던 문장·지치주의·성리학·예학을 중심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이 책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 문장에 힘쓰던 시대에 비하여 지치주의나 교화주의를 힘쓰던 실천유학시대, 자기의 인격과 덕을 쌓는 학문에 힘쓰고 실천을 강조하는 성리학시대에 이르러 한층 예에 힘쓰며 존중하고 결국 예학을
기호학파의 전개 이이의 수제자는 김장생(1548∼1631)이다. 그의 호는 사계(沙溪)인데, 예학에 조예가 깊어 저술이 많았다. ... 이는 공자의 통치철학이기도 하였지만 특히 김장생의 예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가 다스려지면 정치도 다스려지고, 예가 문란하게 되면 정치도 문란하게 된다." ... 학문에 힘써 예학과 성리학에 밝았다. 성리학에 있어서는 주로 이이(李珥)의 설을 따랐으며 인물동이론(人物同異論)에서 인물동성(人物同性)을 주장하는 낙론(洛論)을 지지하였다.
김장생은 연산에 살면서 송익필과 이이의 문하에서 예학(禮學)과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 그 는 이이의 성리학을 재천명하고 이를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적통이 되었고 또한 예학을 대성함으로써 조선 유학의 종장이 되었다. ... 김장생(연산), 박지계(신창), 강학년(연기) 등 호서사림의 중심적 인물이 산림(山林)으로 중용되면서 김집(연산나 나타나고 있다.
이언적 - 이황 - 김성일은 유성룡의 주리론을 계승한 영남학파였고 서경덕 - 이이 - 조헌 등은 김장생의 주기론을 계승,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 또한 예학(禮學)과 보학(譜學)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에 대한 반발은 양명학을 나았으며 비교적 중국에서는 성행한 양명학이 조선에서는 크게 위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조선조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고, 충렬공(忠烈公) 익겸(益謙)의 유복자이며,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만기(萬基)의 아우로서, 숙종대왕의 초비(初妃 ... 또한 사계 김장생의 증손으로 인조 15년에 태어나 벼슬은 병조판서를 지냈고, 현종 14년 9월 허적의 파직을 주장했다가 현종의 진노를 사고 금성으로 정배된 것을 첫 번으로 하여 숙종
왕세자는 영의정 鄭太和(1602~1673)를 비롯하여 예학의 대가인 金長生(1548~1631)의 제자였던 宋時烈(1607~1689), 宋浚吉(1606~1672) 등에게 자문을 구해보라 ... 김만균은 기호학파의 영수 김장생의 증손이며 판서를 지낸 金益熙(1610~1656)의 아들이었는데, 조모인 연산 서씨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했다는 이유로 수행을 피하기 위해 사직소를
특히 예학에 주력하여 스승 김장생으로부터 "이 사람이 훗날 반드시 예가의 종장이 될 것이다" 라는 기대를 받았다. ... 내용이 매우 수준 높은 것인 점으로 보아 예학적 수준을 감지할 수 있다. ... 송준길이 예학에 주력하게 된 것은 그의 학통적 배경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의 무너진 정치·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을 윤리질서의 재건이 무엇보다도 긴요하다는 시대인식과 직결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