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 김만중의 국어․국문에 대한 시각과 애정
- 최초 등록일
- 2008.12.23
- 최종 저작일
- 2007.10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서포 김만중의 국어․국문에 대한 시각과 애정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Ⅱ. 1. 김만중의 생애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그의 문학관과 사상적 측면
Ⅱ. 2. 김만중의 국어 ․ 국문에 대한 시각과 애정
Ⅱ. 2. 1. 서포 김만중의 우리말 시가 옹호론
Ⅱ. 2. 2. 국문소설 <구운몽>, <사씨남정기>
Ⅲ.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序論
서포의 문학은 지금까지 문학사적 위상이나 그 중요도로 인해 수많은 학자들에게 연구되어 왔다.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에 대한 연구정도는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편중현상은 서포의 다른 측면에 대한 연구를 소홀하게 만들었고, 이는 우리로 하여금 김만중하면 소설이라는 부분만을 떠올리게 되는 선입관을 심어 주었다. 따라서 나는 이런 편향성에서 탈피하고 새로운 탐구를 위해 김만중의 국어 ․ 국문에 대한 시각과 애정이라는 측면에서 논지를 이어가고자 한다.
Ⅱ. 本論
2. 1. 김만중의 생애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그의 문학관과 사상적 측면
작가의 연대기적 생애에만 중점을 두고 논지를 전개시켜나가는 것은 안 되겠지만, 김만중의 생애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그의 문학관이나 사상적 측면과 그것을 형성시킨 배경을 간과할 수 없기에 그런 측면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정리해보기로 하겠다.
김만중(1637∼1692)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소설가로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서포(西浦)이다. 조선조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이요,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익겸의 유복자로 태어나 오로지 어머니 윤씨의 남다른 가정교육에 힘입어 성장했는데 그의 생애와 사상도 어머니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베 짜고 수놓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갔으나 학업에 방해가 될까 봐 어린 자식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이는 자식교육에 대한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흔히 맹자의 어머니와 비유되곤 한다.
서포의 어머니의 지극한 정서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1665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수찬 등을 역임하고 암행어사로 활동한다. 그러나 임금 앞에서 직언도 불사하는 강직성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김金`씨 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벌을 받기도 했다. 이후 예조참의로 복귀하여 대사헌을 거쳐 대제학에까지 오르는 등 7년간은 전 생애를 통한 황금기였다. 그러나 숙종이 정비인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고 장희빈을 세우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남해에 유배당한다.
참고 자료
병국, 『서포 김만중의 생애와 문학』,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설성경, 『구운몽 연구』, 국학자료원, 1999
사재동, 『西浦文學의 새로운 探究』, 중이인문사, 2000
사재동, 「한국사상(문학) : 서포(西浦) 김만중의 문화사적 위상」, 한국사상문화학회, 2006
조동일, 「金萬重」, 『韓國文學思想史試論』, 지식산업사,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