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윤리: 차이를 만들기
- 최초 등록일
- 2008.12.02
- 최종 저작일
-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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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공학윤리: 차이를 만들기
목차
챌린저호 참사
처형된 공학자의 유령
사라예보의 수질 회복
1.1절 서론
1.2절 전문직이란 무엇인가?
1.3 전문직 윤리
1.4절 예방윤리로서의 공학윤리
1.5절 사례! 사례! 사례!
1.6 단원요약
본문내용
챌린저호 참사
1986년 우주왕복선 첼린저호가 발사되었다. 그런데 첼린저호가 발사되기 하루 전에 첼린저호의 수석 공학자인 로저 보이스졸리는 오링의 성능에 대한 문제 저온에서 봉인할 수 있는 오링의 성능
로 인해 첼린저호 발사를 다시 검토해야 하며 우주 비행사들의 안전 문제로 첼린저호 발사 중지를 설득하려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드려지지 않았고 나사와의 경영적인 문제 와 성공을 위해서 첼린저호를 발사했다. 하지만 발사 후 73초 만에 첼린저호는 폭발했고 그로인해 첼린저호에 탑승 중이던 우주비행사 6명 및 일반인 1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수백만 달러의 손실뿐만 아니라 고귀한 7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처형된 공학자의 유령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성장한 피터 팔친스키는 어렸을 때부터 근로자들의 근로환경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근로자의 생산성 증가에 관한 작업을 하여 그의 나이 38세에 유럽에서 가장 생산성 있는 선도적인 공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그 후 팔친스키는 10년간의 컨설턴트 업무를 시작하였는데, 공학 프로젝트에 관한 소비에트 독트린과 충돌하는 그의 거리낌 없는 견해 때문에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에 억류되어 그 업무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몇 년 후에 드네프로스트로이에 있는 전력공급기지에 대한 팔친스키의 공학적, 인도주의적 경고는 모두 무시 되었다. 또다시 마그니토고르스키에 있는 용광로와 제철소의 복합단지에 대한 입안들에 주의를 환기시켰으나 이러한 경고들은 묵살되었으며 후에 1929년에 팔친스키는 비밀리에 총살당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이 믿는 공학적 인도주의적 관심사를 위해 투쟁했다.
사라예보의 수질 회복
프레더릭 쿠니는 1969년 그의 나이 27세 때 인터텍트 인터텍트 재난 구조 협회(Intertect Relief and Reconstruction Corporation)
를 창설했다. 그후 전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구제활동을 하고있다. 구제활동중인 1993년,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도시주민들에게 안전한 난방과 물을 공급하기 위해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로 갔다.그들은 목숨이 위험할수도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일을 해냈고 2만 명 이상의 주민들은 안전한 물을 공급 받을 수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