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의 주체
- 최초 등록일
- 2008.05.28
- 최종 저작일
- 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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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왜구의 주체가 조선,제주인이라는 학설에 반대하여 작성한 글
목차
Ⅰ. 서론
Ⅱ. 고려·조선인 주체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1. 기존 학설의 전제
2. 왜구=고려, 조선인 주체론의 문제점
Ⅲ. 왜구=고려인주체론의 근거로서의 이순몽의 발언
Ⅳ. 경인년 이후의 왜구의 주체
1. 경인년 왜구의 주체
2. 1351년 이후의 왜구의 주체
Ⅴ. 결론
본문내용
1. 경인년 왜구의 주체
경인년 이후 고려 멸망에 이르기까지 약 40여 년 간에 걸친 모든 왜구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계기가 되었던 경인년 왜구에 한한다면 어느 정도의 접근이 가능하다. 즉, 경인년의 왜구가 13세기의 왜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규모였던 점, 그리고 1350년 2월에 수십년 동안의 침묵을 깨뜨리고 같은 해 일본 국내의 중요한 정변인 관응의 요란과 때를 같이하여 발생하였던 것, 이후 수십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것 등에서 경인년 왜구의 배경과 원인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경인년 왜구의 침구 장소는 모두 다 대마도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상도의 남해안 내지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에 있는 연안 지역에 집중되어 있어서 13세기의 왜구의 침구 지역과 거의 중복된다. 그들이 공격의 목표로 삼았던 것은 경상·전라 양도에서 수도로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규모는 1000명 전후에 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무렵, 1000명 전후의 왜구를 동원 내지는 조직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치력이 필요하였을 것이므로, 그 배후에는 계획적·조직적으로 왜구를 조종하는 권력의 존재를 상정할 수밖에 없다.
13세기 왜구는 대마도인만으로 구성된 집단, 마쓰라당 만으로 구성된 집단, 대마도인과 마쓰라당의 연합 내지는 대마도를 경유한 왜구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이다. 대마도의 슈고다이 소 쓰네시게는 쇼니 요리히사를 따라서 규슈의 정치 정세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 시기에는 대마도 안에서 소씨의 지배가 확립되어 있었으며, 소 쓰네시게 자신이 왜구의 중심적인 존재였다고 하는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이 대마도야말로 경인년 왜구의 주체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경인년을 전후하여 규슈지방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경인년의 전해에 해당하는 1349년 9월에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서자로 쇼군의 동생인 아시가가 다다요시의 양자이기도 하였던 아시카가 타다휴유가 규슈로 들어와 급격히 세력을 확대시켜 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타다휴유의 세력확장에 가장 큰 위협을 느낀 것이 바로 규슈 지역을 총괄하는 다자이쇼니직을 전통적으로 계승하고 있던 쇼니 요리히사였을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