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삼국의 대외관계
- 최초 등록일
- 2008.05.14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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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고대사회와 국가 수업중 삼국의 대외관계에 대한 발표 보고서입니다.
목차
Ⅰ. 4~6C 삼국과 주변정세
1. 백제
2. 고구려
3. 신라
Ⅱ. 삼국의 대외관계
1. 백제의 대외관계
2. 고구려의 대외관계
3. 신라의 대외관계
Ⅲ. 광개토대왕비와 칠지도를 통해본 임나일본부
1. 칠지도
2. 광개토대왕비
3. 임나일본부의 모순
Ⅳ. 맺음말
본문내용
2. 고구려의 대외관계
(중국)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를 시기별로 나눈다면 대개 중국군현과의 관계시기, 남북조제국과의 관계시기, 수당제국과의 관계시기 등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시기는 고구려가 고대국가를 형성하면서 외적인 팽창을 추구해 나간 시기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14년(313)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고구려본기 미천왕 대의 기사를 보면 위와 같이 나와 있다. 그리고 313년에 낙랑군을 멸망시켰다고 하는데, 이는 400년에 걸치는 중국군현의 한반도지배에 종지부를 찍은 결과를 낳게 되었다.
남북조의 제국과 고구려와의 관계에서는 책봉체제의 형식이 갖추어져가는 시기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고구려가 중국의 분열상태를 적절히 이용하여 대 중국 이중외교라는 자주외교를 전개한 전형적인 시기로 파악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위관계에 있어서는 위·오의 대립과정에서 오의 대고구려접근에서 비롯된 고구려의 이중외교의 자세, 공손씨 멸망 이후 위와의 대립 및 고구려의 팽창, 그 결과로서 유주자사 관구검의 2번에 걸친 고구려 침략 등을 유발하였다.
삼국사기 동천왕 대의 기사를 보면,
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毋丘儉 將萬人 出玄來侵
“20년(246) 가을 8월에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을 보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로부터 침범하여 왔다.”
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참고 자료
이기백, 《한국사 신론》, 일조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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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 《삼국유사》, 민음사, 2007.
한국고대사학회, 《한국 고대사 연구의 새 동향》, 서경문화사, 2007.
최몽룡, 《한국 고고학·고대사의 신 연구》, 주류성, 200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5-7》, 국사편찬위원회,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