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상의 발견과 상업혁명
- 최초 등록일
- 2008.02.15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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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세말 흑사병의 출현으로 인구의 급감과 동시에 과학적 사고가 시작된 유럽 강대국의 대항해의 시작 이후, 정복전쟁에 관한 레포트입니다. 그러한 지리상의 발견을 통하여 유럽이 얻은 물질적 혜택을 불러와 상업체제의 혁신에 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지리상의 발견과 대서양 연안 국가의 부상
1) 대항해의 씨앗 ‘십자군 전쟁’
2) 후추, 신대륙 발견의 주역
3) 포르투갈, 스페인의 독립과 부상
4) 지리상 발견의 효시 엔리케 왕자
5) 신대륙의 세계사로의 편입
2. 제해권과 무역 주도권의 이동
1) 포르투갈의 동방무역
2) 엘도라도를 찾아서
3) 네덜란드의 독립과 암스테르담의 발전
4) 최후의 승자 영국
3. 무역과 경제의 변화
1) 최고의 무역상품 ‘노예무역’
2) 상업 체제의 변혁
Ⅲ. 결론
본문내용
동․서양 교류가 어려워지면서 지리상의 발견이 시작 된 것이다. 동서양의 교류는 기원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갖는다. 확인된 자료를 통해 봐도 이미 기원전 5~6세기에 동서양의 활발한 교통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수천 년 동안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는 통로는 모두 세 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이른바 비단길(Silk Road)로 통하는 오아시스 루트다. 중동 지방의 사막을 넘나들며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길이 열린 탓에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유럽인이 이곳을 넘기만 한다면 중국까지는 가는 데에는 크게 무리가 없었다. 주요 수입품은 비단 등이다. 두 번째가 스텝(stepps) 루트. 몽고를 중심으로 한 북아시아의 스텝 지대를 횡단하는 길이다. 북아시아 유목민들이 중국 상품을 수송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비단과 함께 시베리아산 모피가 가장 중요한 교역품 이였다. 세 번째로, 그렇게 활발하지는 못했지만, 해양 루트도 있었다.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서로는 홍해와 페리시아 만까지, 동으로는 중국까지 이어져 각 해로를 차지한 상인들에 의해 교역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동서교역이 시작된 이후 수천 년 동안 십자군 전쟁만큼 큰 충격을 준 사건은 없었다. 이 전쟁은 11세기 중반 이슬람교를 믿던 중앙아시아의 유목 민족 셀주크 투르크가 지중해에 진출하여 성지 예루살렘을 장악한 데에서 비롯됐다. 이 전쟁은 1096년부터 1270년까지 무려 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계속되었으니 역사적으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장기전이었다. 유럽이 대대적으로 원정군을 파견한 것만 모두 7차례. 하지만 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랜 전쟁으로 사회가 황폐해진 탓이다. 이 전쟁으로 유럽의 ‘중세’는 막을 내린다.
참고 자료
최영순. 2002. 『경제사 오디세이』서울: 부키
이재광, 김진회. 2001.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서울: 세상의 창
케네디, 폴. 1995 『강대국의 흥망』이백수, 전남석, 황건 공역. 서울: 한국경제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