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지역의 독립운동
- 최초 등록일
- 2007.10.29
- 최종 저작일
- 2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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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제지역의 의병운동, 3`1운동, 항일운동에 대해 조사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의병활동
2. 3·1운동
3. 항일운동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의병활동
한말의 의병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계기가 되어 발생한 것으로, 그 활동시기에 따라 을미의병, 병오의병, 정미의병 등으로 구분된다. 을미의병은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그리고 복제의 변경조치로 발생하였고, 병오의병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1905년 강제로 을사보호 조약을 체결하자 이에 반대하여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정미의병은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하여 발생한 것을 말한다. 일제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가진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이 계속되자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의병이라고 생각하여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1909년 9월부터 2개월 동안 진행된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에서만 의병장 100여 명, 의병 4000여 명이 붙들리거나 학살당하였다. 일제의 공세가 거세어지면서 의병 전쟁은 차츰 위축되었고 규모도 작아졌다. 그러나 의병들의 항전은 1910년대 중반까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한편 많은 의병 부대가 간도나 연해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무장 독립군으로 재편성되어 치열한 독립 전쟁을 전개하였다.
김제지역에서도 적지 않은 의병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일제가 토벌작전을 하면서 의병활동으로 체포되어 법정에서 형을 받은 자만 기록으로 남아있었다. 그들은 자사일, 김광춘, 김찬경, 김치국, 박영춘, 지춘경이다. 이들 중 자사일과 김광춘, 김찬경은 김해산의 부하였고 박영춘은 안종문의 부하였다. 이들은 모두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들 외의 두 사람, 즉 망건제조업을 하던 김치국과 농사를 짓던 지춘경은 군자금을 조달한 혐의로 형을 받았다.
2. 3·1운동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 한 후 헌병, 경찰 등 무력을 바탕으로 하여 이른바 무단통치를 자행하고 또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함으로 대규모 토지집적을 하여 조선 농민의 몰락을 초래케 하였다. 여기에 회사령 등을 통하여 민족자본을 억압하고 식민지 경제구조를 구축하였
참고 자료
- 김제시사 제 2편 역사
제 7장 2절 <한말 의병항쟁과 김제>
제 8장 1절 <항일운동과 김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