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의 재조명
- 최초 등록일
- 2007.05.20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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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인물 장희빈을 재조명(재평가)해 봤습니다.
목차
-“장희빈” 그녀는 누구인가? 어떻게 하여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었을까?
-그러면 왜 장옥정은 이런 풍족한 집안에서 궁녀로 들어가게 되었을까?
-왜 숙종은 민씨를 폐위시키려고 하였을까?
-왜 숙종은 후회하였을까?
-왜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을까?
본문내용
몇년전 한창 인기를 누리던 ‘장희빈’이라는 사극드라마가 있었다. 역사에서 희빈 장씨는 사악한 요부로 조명되고 있다. 역사에서 누군가를 재조명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다.
아마 조선시대 역사에서 희빈 장씨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그녀는 누구이고 그녀가 어떻게 궁녀에서 왕비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장희빈” 그녀는 누구인가? 어떻게 하여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었을까?
한 백과사전에서는 이렇게 장희빈을 기록한다.
《숙종의 빈. 숙종은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였는데, 희빈 장씨가 소의로 있을 때에 왕자 윤을 출산하였다. 그리하여 숙종은 1689년(숙종 15) 1월에 윤을 세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소의에서 희빈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왕자 윤에 대한 세자 책봉이 불가하다고 상소한 송시열을 유배되어 사사시키면서 서인들을 축출하는 한편, 권대운 등의 남인으로 하여금 정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해 5월에는 인현왕후를 폐출하면서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반대하는 서인 박태보 등 80여 명에게 참혹한 형벌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춘택 등이 인현왕후의 복위 운동을 일으키자, 인현왕후의 폐출을 후회하고 있던 숙종이 1694년(숙종 20)에 남인을 몰아내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면서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1701년(숙종 27)에는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일이 발각되면서 오빠 장희재와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궁녀 출신으로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왕비 자리까지 올랐지만, 결국은 사약을 받고만 여인-장희빈
또한 경종의 어머니였고 한때는 중전의 자리까지 올라갔던 그녀.. 본명은 장옥정이며 본관은 인동(仁同). 역관 장현(張炫)의 종질녀이다.
숙종의 세번째 왕비, 장옥정. 그녀는 비록 양반은 아니었지만, 조선 시대 손꼽히는 명문 역관 집안의 딸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