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건국사
- 최초 등록일
- 2007.01.06
- 최종 저작일
- 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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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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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서기 20년 대무신왕은 자신의 즉위한지 3년이 되는 해에 동명왕의 사당을 완정하였다. 사당의 안쪽에는 동명왕의 위패가 모셔지고, 이 때부터 주몽 곧 동명왕은 고구려 건국의 시조신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동명왕묘를 세우고 주몽을 시조신으로 받듦으로서 여러 가지 성과를 얻게 되었다. 왕실과 왕의 권위를 신과 연결하여 더욱 명확히 세우게 되었다. 또한 고구려 연맹의 장으로서 위신과 체통을 갖추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서자라는 혈통상의 약점으로 인해 동부여의 왕실에 대해 가졌던 정신적 부담감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왕실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주몽신화가 풍부한 내용과 구체적인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유리왕 22년 국내성으로의 천도 이후의 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믿어온 천신과 수도 국내성 부근의 지신이라고도 볼 수 있는 굴의 신(수신)이 부부관계로 맺어지면서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주몽 곧 동명왕은 하늘의 아들이자 땅의 아들이 되어 고구려 시조왕으로서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이전의 동맹이 기본적으로 부여의 영고를 계승한 제천의식이었던 것과는 질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국내성 천도와 제천의식인 동맹에서 숭배하는 신들의 체제를 정비한 것은, 고구려인들이 부여의 전통적인 신앙체계를 극복하고 신앙체계의 토착화 자기화를 이루어 정체성 확립을 향해 큰 걸음을 내디딘 의미심장한 대변동이라고 볼 수 있다.
국내성으로 천도한 후 대무신황 2년까지는 17년이 흘러, 천신과 수신 그리고 동명왕을 모시는 제사기 이미 십여 차례 행해지면서 여러 이야기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제대로 체계를 갖춘 이야기로 만들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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