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이규보와 동명왕편
- 최초 등록일
- 2006.01.03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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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규보와 동명왕편에 대한 자료입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시대상황
2. 이규보에 대해서
3. 東明王篇
Ⅲ. 결론
본문내용
특히, 죽림고회의 최연장자 였던 오세제와는 35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각별한 사이였다. 오세재가 죽었을 때 이규보는 ‘오선생덕전애사 吳先生德全哀詞’를 짓기도 했고 ‘종유從遊한지 겨우 3년에 불과하여 그의 향기를 죄다 받들어 계승하지는 못했으나 그분께서 내게 적셔준 여고餘膏는 실로 다대多大하다’고 술회하며 오세재가 자신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음을 시사했다.
또 살펴볼만 한 것은 죽림고회의 회원이었던 이인로李仁老와 이규보의 관계이다. 이인로는 용사用事를 중시했는데 이는 과거 명문名文의 표현등을 빌려서 창작하는 방식이다. 이인로는 명문의 전례를 따르는 것만이 확실한 길이라고 하며 특히 소식蘇軾의 표현을 즐겨 따랐다. 이에 반해 이규보는 이인로등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소식을 지나치게 숭상하며 그의 글을 따라하는 데에만 치중하는 것을 비난하며 개인의 경험에서 나오는 새로운 착상이 소중하다고 얘기했다
이규보 과거에 합격(1190년)하고나서도 1199년까지 관직에 나가지 못한다. 이규보는 그대로 산에 들어가 스스로를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칭하며 자유롭게 살다가,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읽고 느낀바 있어 구비전승 되던 민간의 설화를 함께 엮어 “동명왕편”을 만들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규보는 불교와 도교의 자유롭고 탈속적인 면을 좋아했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고 싶어했지만 “동명왕편”을 엮고 4년 후인 1197년 최충헌의 측근들에게 서신을 보내 관리자리를 구했다는 것이다. 문신의 등용이 확대되어 많은 문신들이 관직에 나가는데 자신은 관직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지방관리라도 시켜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또 최충헌의 초청시회招請詩會에서 최충헌을 국가적인 대공로자로 추앙하는 시를 읊었고 그 직후에야 사록 겸장서기로서 전주목에 부임 할 수 있었다..
이규보는 명문장가로 이름났었고, 혹자는 ‘해동의 공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가 남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은 목은집과 함께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문집 중 가장 방대한 문집이다. 또 ‘동명왕편’은 조선시대 영웅서사시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까지도 그 영향이 막대했고, 지금에도 한국문학사 영웅서사시의 원류로 그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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