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해방 후의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 최초 등록일
- 2005.06.15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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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서 론
2.본 론
1) 이승만의 귀국과 정치 세력 통합운동
2) 이승만과 미군정
3) 5 ․ 10 선거와 대한민국 정부수립
3.결 론
본문내용
이승만은 1945년 8월 14일 밤 11시(미국 시간) 워싱턴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그날 밤 이승만은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그의 자택으로 달려온 독립운동 동지들과 기쁨을 나누면서도 향후 조국의 운명과 관련하여 “소련이 어떻게 나올지가 걱정이다. 미국이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면 한반도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당간에 피를 흘리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걱정했다. 이승만은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자마자 귀국을 서둘렀다. 그러나 그의 귀국은 미국무성의 비협조적 태도로 인해 크게 지체되었다. 당시 미국무성의 관리들 가운데는 히스 특별정치국장과 빈센트 극동정치국장을 비롯한 많은 수의 친소 ․ 친중공 인사 혹은 공산주의 동조자 내지 공산주의자들이 있었으며, 중국 및 극동문제를 담당하는 관리들 가운데도 친공산주의자 내지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확고한 민족자주의식과 단호한 반공 ․ 반소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이승만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을 것은 당연하다. 미국무성내의 좌익관리들의 이승만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히스(Alger Hiss) 특별정치국장, 빈센트(John Carter Vincent) 극동국장 등과 같은 친소 ․ 친중공인사 내지 공산주의자들이 2차세계대전 말기 미국무성에 침투해 있었고 중국과 극동문제를 담당하는 관리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람들이 민족자주의식이 강하고 확고한 반공 ․ 반소 입장을 취하고 있는 이승만에게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사』(현음사:양동안) p.556이들은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정부의 승인 획득 노력을 비롯한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방해하여 왔으며 마침내는 이승만의 귀국도 직 ․ 간접적으로 방해하였다. 이승만이 신속하게 귀국하여 한국정치의 기선을 장악하게 되면 한반도 문제 처리에 관한 그들의 구상 실천과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 불리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참고 자료
『대한민국 건국사』현음사, 양동안, 2001.
『이승만 연구』연세대학교 출판부, 유영익, 2000.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