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일제의 식민정책
Ⅰ. 제1기의 식민정책
Ⅱ. 제 2기의 식민정책
Ⅲ. 제 3기의 식민정책
생각해 볼 문제
본문내용
머리말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정부는 총리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조중웅, 내부대신 박제순, 탁지부대신 고영희와 황족 대표 이재면 및 정계의 원로 김윤식 등이 참석한 가운데 비밀리에 어전회의를 열어 일제가 강요하고 있던 병합조약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이완용 사이에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니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간 이후 행정권, 군사권, 사법권을 차례로 빼앗아 가던 일본이 마침내 대한제국의 국가주권을 소멸시키고, 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일본제국주의에 국권을 침탈당한 한국은 이후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기나긴 시간동안 일제의 식민지배하에서 엄청난 고통과 치욕을 감내해야 했다.
서구 자본주의세력의 침략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해야 했던 일제는 급속한 공업화를 통한 조속한 자본주의 발전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 자본주의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한편으로는 독점단계에 접어드는 현상을 드러낸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의 정치·경제·사회의 각 부문에 봉건적 유제가 강고하게 온존됨으로써 국내 구매력이 저하되어 자본주의의 순조로운 발전에 큰 장애요인이 되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이 일본 자본주의가 일찍부터 해외시장 침략에 나서게 된 배경의 하나이다. 또한 일본 상품의 질이 영국·미국·독일에 비하여 낮고 세계시장의 대부분이 열강에 의해 장악되어 일본이 끼어들 틈이 없었던 조건도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의 원인이었다. 더구나 일본 독점자본은 아직 미약하여 겨우 자본수출을 시작하는 단계에 있었으므로 영·미 제국주의처럼 식민지의 어느 계급을 경제적으로 매판화시킬만한 힘이 없었다. 그러므로 일본 자본주의는 영·미 금융자본에 종속되는 한편 무력으로 새 시장을 침략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지리적으로 가까운 아시아 대륙을 침략하는데서 활로를 찾게 되었다.
특히 한국을 병합함으로써 이를 식량·원료의 공급지, 일본 상품의 판매시장 및 자본의 투하지로 삼아 일본 자본주의의 외연을 확대하는 동시에, 대륙침략을 실현할 수 있는 직접적인 교두보를 마련코자 하였다. 말하자면 일제에 있어 한반도는 그들의 생명선으로서 만주와 몽고, 그리고 중국대륙침략의 전진기지였던 샘이다. 그만큼 한국 지배는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에 필수 불가결하였으며, 따라서 한국을 일본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정책은 일제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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