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관계론] 남북한의 분단 및 통일
- 최초 등록일
- 2005.04.10
- 최종 저작일
- 2002.08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I. 서론
II. 분단의 과정 -일본의 역할을 중심으로
III. 분단의 필연성에 대한 논의 -좌우합작을 중심으로
IV. 현시대의 통일방안 -햇볕정책을 중심으로
V. 결론
본문내용
II. 분단의 과정 -일본의 역할을 중심으로
38선과 남북분단은 미·소 냉전체제의 산물이고, 일제의 식민주의는 단지 역사적 배경에 지나지 않았는가? 1943년 1월 루스벨트와 처칠은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독일과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연합국의 정책목표로 결정하고 그 해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연합국은 일본에 대한 무조건항복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일본은 1943년 초부터 ‘화평공작’을 진행시켰는데, 그 핵심은 일본 본토에서의 국체 유지, 즉 천황제 보존과 아울러 ‘조선과 대만의 영유’였다. 하지만 일본의 그러한 요구는 묵살되어 졌고, 1948년 7월 포츠담선언에서 “일본의 영토는 일본본토에만 한정된다.”는 원칙이 천명되어졌고, 결국 미국의 원폭이후 연합국 총사령관에게 천황은 복종한다는 것을 전제로 일본은 항복하였다. 일본의 항복으로 조선은 일본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본은 연합국의 한반도 점령방식에 모종에 영향력을 발휘하여, 38선문제와 관련되는 것과 38선 이남지역의 점령정책에 충분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38선에 관해서는 1945년 8월 미국의 3부조정위원회화 휘하의 전략정책단에 의해서 급하게 획정되어졌던 것으로 알려진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45년 주둔군 사령관 하지의 “미국 국무성에서는 조선이 미·소 양 지대로 분할되게 된 원인이 일본 항복 당시 일본군대의 배치로 인하여 북위 38도 이북의 일본군은 소군에, 이남의 일본군은 미군에 각각 항복하라고 지령하였다.” 성명발표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군대의 배치’가 38선의 원인이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항복하기 전의 일본군의 배치는 미국보다는 소련에 대항하는 체제로 편성되어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미국보다는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에 더욱 공포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본은 종전 직후 일본정부와 일본대본영, 조선총독부와 조선주둔군이 나서서 소련보다는 미국의 점령군에게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해방이후에도 38선 이남에서 안전하게 자신들의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고, 심지어 8월 23일이후부터는 치안유지까지 자신들의 손으로 할 수가 있었다.
예컨대 8월 16~24일 해방 1주일 동안 694건에 달하던 조선인의 식민통치 기구와 신사에 대한 공격이 8월 24일 이후에는 단 한 건도 없었다. 그러면서 미국에 대한 친화정책은 계속되어졌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은 일본인”이라고 고백하는 하지 사령관의 고백은 무서운 진실이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 이종석, 『분단시대의 통일학』, 한울, 1998
* 조찬래 외 공저, 『남북한 통합론』, 대왕사, 1998
* 도진순,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 당대, 2001
* 신복룡, 『한국분단사연구』, 한울,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