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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 공민왕 5년(1356년)의 개혁, 반원개혁인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여는 말
2. 공민왕에 대하여
3. 공민왕 5년의 개혁이란
4. 반원개혁이라는 입장 - 민현구 선생
5. 반원개혁이 아니라는 입장 (1) - 김경록 선생
6. 반원개혁이 아니라는 입장 (2) - 이강한 선생
7. 반원개혁이 아니라는 입장 (3) - 이명미 선생
8. 반원개혁이 아니라는 입장 (4) - 최종석 선생
9. 5~8 연구에 대한 반박 – 이익주 선생
본문내용
고려 공민왕(恭愍王)은 일반 대중들에게 ‘반원자주’, ‘노국대장공주와의 사랑’, ‘신돈 등용’ 등의 키워드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반원자주’라는 키워드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시대상을 반영함과 동시에 우리 역사를 관통하는 키워드라는 점에서 많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다.
공민왕은 재위 기간 총 4차례 개혁과 관련된 교서를 반포하였다. 원년, 5년, 12년, 20년의 교서가 바로 그것이다. 그중에서 ‘반원자주’의 대표로 꼽히는 개혁은 5년의 개혁이다. 이 개혁은 공민왕의 기민한 책략과 정략적인 수가 빛나는 개혁이며, 동시에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리며 기존의 여원(麗元) 관계를 획기적으로 뒤바꾼 개혁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근 십수년 동안 고려사 연구의 저변이 확장되고, 상당한 연구 결과들이 축적되면서 공민왕 5년의 개혁에 통설에 비판을 가하는 연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공민왕 5년에 진행된 일련의 개혁은 ‘반원적’ 성격보다는 국내 정치에서 왕권의 강화와 안정을 위한 한 수였고, 원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큰 변화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득세하게 되었다.
일련의 이러한 흐름에 반하여, 공민왕의 개혁이 반원이 아니라는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연구가 등장하면서 공민왕 5년의 개혁은 ‘반원적’이라는 쪽으로 다시 기울게 되었다.
공민왕 5년의 개혁은 과연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을까. 공민왕 5년 개혁에 대한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검토하며 살펴보도록 하겠다.
참고 자료
민현구, 「고려 공민왕의 (恭愍王) 반원적 (反元的) 개혁정치에 대한 일고찰 - 배경과 발단 (發端) -」, 『진단학보』68, 1989.
민현구, 「공민왕(恭愍王)」, 『한국사시민강좌』31, 2002.
김경록, 「공민왕대 국제정세와 대외관계의 전개양상」, 『역사와 현실』64, 2007.
이강한, 「공민왕 5년(1356) "반원개혁(反元改革)"의 재검토」, 『대동문화연구』65, 2009.
최종석, 「1356(공민왕 5)~1369년(공민왕 18) 고려-몽골(원) 관계의 성격 : ‘원간섭기’와의 연속성을 중심으로」, 『역사교육』116, 2010.
이명미, 「공민왕대 초반 군주권 재구축 시도와 奇氏一家 : 1356년(공민왕 5) 개혁을 중심으로」, 『한국문화』53, 2011.
홍영의, 「개혁군주 공민왕 : 공민왕의 즉위와 초기 국왕권 강화노력」, 『한국인물사연구』18, 2012.
이익주, 「1356년 공민왕 反元政治 再論」, 『역사학보』225, 2015.
민현구, 「高麗 恭愍王代의 反元的 改革政治와 ‘丙申年敎書’」, 『한국문화』96,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