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식문화] 조선시대의 장신구, 화장구
- 최초 등록일
- 2004.06.08
- 최종 저작일
- 2004.06
- 10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3,500원
소개글
조선시대 여인의 장신구와 화장구의 형태와 종류에 대해 알아보고, 그것의 형태와 문양에서 나타난 상징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목차
Ⅰ. 서론
Ⅱ. 조선시대 여인의 장신구
1. 머리장식
2. 노리개
3. 주머니
4. 이식
5. 지환
6. 단추
Ⅲ. 조선시대 여인의 화장구
1. 화장기
2. 화장품의 원료
Ⅳ. 형태와 문양에 나타난 상징미
Ⅴ. 결론
☆ 참고문헌 ☆
본문내용
Ⅰ. 서론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사치와 퇴폐풍조에 대한 반발로 근검ㆍ절약을 강조하고 사치스러운 옷차림과 장신구ㆍ화장에 대하여 여러 차례 금지령이 내린 바 있다. 장신구에 있어서 유교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상고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목걸이ㆍ귀걸이ㆍ팔지 등의 사용 습관은 거의 사라지게 되고 발달이 미미해졌다. 아울러 금ㆍ은의 사용을 막았던 정책은 찬란하였던 우리의 금은 세공기술을 퇴보시켰다. 그러나 머리장식이나 노리개 등은 다양하게 발달하여 조선시대 장신구의 소박하고 정교한 특성을 이루었다.
조선시대에는 진한 화장을 풍기문란의 원인으로 보고 사대부의 여인에게 화장은 금기처럼 여겨져 화장문화가 쇠퇴하였다. 이에 따라 당연히 '반가(班家)'와 '기방'의 여인이 구분되어, 화장을 하던 기방 여인은 '분대(粉黛)'라는 별호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당대의 색조화장에 대한 규제는 기초화장과 청결화장으로 관심을 몰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시대 여인들의 몸치장이 발달하지 못한 것은 유교사상 외에 경제적인 이유도 없지 않았다. 장기간에 걸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산업구조가 복구되지 못하여 전반적으로 경제적인 곤란을 겪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화장품 산업도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참고 자료
ㆍ금기숙, 「조선복식미술」, 열화당, 1994.
ㆍ국립민속박물관, 「한국복식 2천년」, 도서출판 신유, 1997.
ㆍ김영자, 「한국의 복식미」, 민음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