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와 스파르타 비교 분석 리포트
- 최초 등록일
- 2023.04.28
- 최종 저작일
- 20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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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테네는 그리스의 수도이자 최대의 도시이며, 아티키 주의 중심 도시이며 대략 기원전 11세기 ~ 7세기부터이며 스파르타 또는 스파르테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로 기원전 9세기 ~ 기원전 195년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기록·사료가 많아 폴리스 문명의 대표가 되는데. 그리스 문명은 약 1500개의 폴리스로 구성된다. 강의 중 그리스 문명에 대해 듣고 폴리스 문명의 대표가 되며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 비교하며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목차
1) 민주정과 과두정
2) 계급 제도
3-1) 펠로폰네소스 전쟁
3-2) 델로스 동맹
3-3) 펠로폰네소스 동맹
4) 가재노예제와 국가노예제(헬로트)
참고문헌
본문내용
(민주정)아테네 민주주의는 기원전 5세기 무렵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폴리스)인 아테나이를 중심으로한 아티키에서 시작된 정치 체제이다.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적 정체로 평가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노예제 내 다양한 흐름 중 하나라고 여겨진다.
고전 시대 후기에 들어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도 아테네식 민주주의가 도입되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 체제로서 입법과 행정에 대한 결정은 유권자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었다. 참정권은 모든 주민에게 부여되지 않았으며, 유권자는 성인 남성으로 제한되었다. 이에 따라 미성년자, 여성, 노예, 외국인 등은 투표에 참여할 수 없었다. 아테네의 주민은 총 25만에서 30만 명 정도였으며 이 가운데 유권자는 3만에서 5만 명 정도였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로는 솔론, 클레이스테네스, 에피알테스 등이 있다. 가장 오랫동안 아테나이의 지도자 자리를 유지하였던 페리클레스가 죽은 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거치면서 아테네 민주주의는 과두제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과두정)리산드로스는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이후 많은 친 스파르타 정부가 들어서게 한 스파르타인이었다. 그는 또한 많은 스파르타 요새를 세우기도 했다. 그가 수립한 대부분의 폴리스 통치 체제는 10두정이라고 불리는 10인으로 구성된 과두제였다. 스파르타의 군 사령관인 하르모스트가 10두정의 수장이 되었다. 지명된 이는 스파르타보다는 리산드로스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었고, 이 체제는 리산드로스의 개인 제국이라는 말로 묘사되어 왔다. 이런 새로운 에게 해 질서 확립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추방되었지만, 반면 아기나나 멜로스는 그들의 전 주민들로 복구되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인들을 어떻게 처리할까를 두고 분열되었다. 리산드로스와 아기스 왕은 주요한 동맹이었던 코린토스와 테바이에 그랬던 것 같이 완전한 파괴를 주장했다. 반면 파우사니아스가 이끄는 온건파가 우세했다.
참고 자료
불의 문 ‧ 스티븐 프레스필드 저 / 이은희 옮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차이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donmany0203&logNo=30103374566
스파르타가 쇠락한 진짜 이유 / PPSS https://ppss.kr/archives/25409
ATHENS and SPARTA / Constructing Greek Political and Social History from 478bc / ByAnton Powell / Routle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