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우선주의와 독일연방제
- 최초 등록일
- 2021.12.23
- 최종 저작일
- 20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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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오스트리아 우선주의와 독일연방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캐슬레이와 메테르니히
Ⅲ. 독일 위원회의 출범
Ⅳ. 연방규약과 전체회의와 특별위원회
1. 연방규약
2. 전체회의와 특별위원회
Ⅴ. 독일연방의 군대운용
Ⅵ. 결 론
VII. 참고문헌
본문내용
독일연방 탄생의 배경은 1814년 9월 18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에서 유럽의 체제 회복을 위한 빈 회의가 열리며 약 200여 국가 및 도시의 대표들이 빈 회의장에 모여 1815년 6월 9일까지 계속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메테르니히 외무장관, 프로이센은 하르덴베르크 수상과 훔볼트 수석대표, 영국의 캐슬레이 외무장관과 웰링턴 장군, 러시아는 알렉산더 1세 황제와 네셀로데 외무장관, 그리고 패전국 프랑스의 대표로는 탈레랑 외무장관이 각각 자국의 대표자격으로 빈 회의에 참석하였다. 독일문제를 논의한 독일위원회와 유럽문제를 논의한 유럽위원회로 분리되어 빈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이 가운데서 러시아, 영국,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동맹 4국과 패전국 프랑스로 구성된 5강 위원회가 빈 회의를 주도하였다. 패전국인 프랑스가 회의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탈레랑의 외교적 능력과 더불어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와 프랑스의 탈레랑이 개인적인 친분이 어느 정도는 작용했기 때문이다. 빈 회의는 5대 원칙에 의거해서 진행되었다. 첫째는 나폴레옹 체제의 청산과 나폴레옹 이전의 앙시앙레짐의 원상회복하여 정통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탈레랑의 프랑스가 5강 위원회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프랑스가 승전국과 동등한 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던 것도 프랑스가 구체제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둘째는 1792년 이전의 지배체제와 더불어 복고정책의 정상적인 시행이었다. 셋째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운동을 차단하기 위해 각국 국왕의 강력한 권위를 보장하는 것이었고, 넷째는 국제적으로 국가 간의 연대의식, 마지막으로 미래의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영국의 외무장관 캐슬레이와 오스트리아의 외무장관인 메테르니히가 강력히 주장한 유럽의 균형과 안정이었다. 메테르니히가 추구한 마지막 원칙은 궁극적으로 유럽의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독일권 내의 오스트리아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독일권을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재통합하고자 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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