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태
- 최초 등록일
- 2021.08.18
- 최종 저작일
- 2021.08
- 8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3,500원
소개글
제주 43사건 배경 및 전개과정과 제주 43사건 이후 상황분석 및 느낀점에 대해 서술한 레포트입니다.
정말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믿고 다운 받아주세요 !!
목차
1. 제주 43사건 배경과 전개과정
(1) 발발배경
(2) 전개과정
2. 제주 43사건 피해규모 분석
3. 제주 43사건의 의문점
4, 제주 43사건 이후 상황분석
5. 결론 및 느낀점
본문내용
1. 제주 43사건 배경과 전개과정
(1) 발발배경
제주 43사건의 배경은 굉장히 복잡한 원인들이 혼합되어 있어 제주 43사건의 발발배경은 단 한가지로는 설명을 할수없다. 제주도는 동북아지역 요충지라는 지리적이점이 있기 때문에 과거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제주도 상륙을 막기위해 일본군 수만명이 주둔하는 군사전략적인 주둔기지로 변모하였고, 종전 이후 일본군의 철수와 외지로 이동하였던 토착 제주도민 6만여 명의 귀환으로 인구구성에 급격한 변동이 발생하였다.
제주도에서는 광복 이후의 제주도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제주도 귀환인구의 구인난, 생필품의 부족, 전염병에 의한 수백여명의 사망, 흉년 등의 악재들이 겹쳤고,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군정관리의 모리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터져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2) 전개과정
3.1절 발포사건은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6명 사망, 8명 중상을 입힌 사건으로, 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일반주민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바로 이 사건이 4·3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경찰발포에 항의한‘3·10 총파업’은 관공서 민간기업 등 제주도 전체의 직장 95% 이상이 참여한,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사태를 중히 여긴 미군정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 이 총파업이 경찰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사람들로 교체됐고, 응원경찰과 서청 단원 등이 대거 제주에 내려가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검속 한달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테러와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에는 일선 지서에서 잇따라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 노출로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