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시대 사학 비교
- 최초 등록일
- 2021.07.26
- 최종 저작일
- 20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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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당송시대 사학 비교"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1) 당나라 사학
2) 송나라 사학
3) 당송 상호 비교
3. 결론
본문내용
1. 서론
당(唐)나라와 송(宋)나라는 중국의 학술문화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시기로 평가된다. 특히 각각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과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는 혼란했던 시기를 제압하고 등장한 당나라와 송나라는 그 점에서 비슷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당나라는 대외적으로 활발했으며 황실에 선비족(鮮卑族)의 혈통이 섞인 만큼 이민족에게 관대했던 국제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당나라 군대라는 오명에 맞지 않게 주변의 나라들을 상대로 뛰어난 군사력을 과시했으며 절도사로 대표되는 국경 방어력도 상당했다. 반면 절도사(節度使)들의 난립과 황소의 난(黃巢─亂)으로 당나라 멸망한 이후 찾아온 오대십국을 종식시킨 송나라의 경우 당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형편없었던 군사력을 보여주었고, 송 태조(太祖) 조광윤(趙匡胤)에 의한 문벌주의 정책으로 무에 비해 문을 중시하게 되었다. 더구나 일찍이 중국에서 굴지의 세력을 자랑했던 관롱집단(關隴集團)이 황소의 난을 거치거나 주전충(朱全忠)에 의해 소멸하면서 문벌귀족 세력이 일소되는 등 당나라와 송나라는 큰 사회적 차이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차이점이 당나라와 송나라의 사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그 결과 두 나라의 사학에 어떤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2. 본론
1) 당나라 사학
당나라 건국 이전에 등장했던 수(隋)나라의 경우 수 문제(文帝) 시기에 과거제(科擧制)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선거제가 실시되기도 하고 균전제(均田制) 등의 토지 제도를 확립하는 등 국가의 제도를 정비하면서 사회 다방면에서의 발전이 있었지만 괄목할만한 사학의 발전은 없었다. 이는 수 문제가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혐오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직접 관리들에게 뇌물을 보내고 그 뇌물을 받은 자를 참할 정도로 성실하기는 했지만 다른 신하들과 의논하기보다 늦은 밤까지 식사를 거르면서 국정을 혼자서 처리할 정도로 의심이 많고 학문적 소양이 부족했던 것과 뒤이어 등장한 수 양제(煬帝)의 사치와 향락, 폭정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참고 자료
젠보짠, 『중국사 강요 1 (선사시대부터 당나라까지)』, 중앙북스, 2015.12.28
젠보짠, 『중국사 강요 2 (오대십국부터 근대까지)』, 중앙북스, 2015.12.28
판원란, 『중국통사강본』, 경지출판사, 2016.11.07.
두유운, 『중국과 서양의 고대사학 비교』, 이준희(역), 어문학사, 2017.01.19
it끌림편집부, 『중국 당나라 흥망성쇠』, it 끌림, 2017.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