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이론_문묘제례악과 종묘제례악
- 최초 등록일
- 2021.06.30
- 최종 저작일
- 20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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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악이론_ 문묘제례악과 종묘제례악을 간단하게 정리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문묘제례악
1) 역사
2) 악기 편성
3) 음악적 특징
4) 문묘제례의 무용적 특색
5) 문묘제례악의 절차
2. 종묘제례악
1) 역사
본문내용
문묘는 문선왕 칭호를 받은 공자와 그의 제자 안자, 증자, 맹자 등의 학덕이 높은 사람들을 모신 사당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최치원, 설총 등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문묘제례악은 이러한 문묘제례에 수반되는 음악과 춤을 이야기 한다.
1. 역사
한국의 문묘제례악은 1116년(고려 예종 11) 하례사로 중국 송(宋)나라에 갔던 왕자지(王字之)·문공미(文公美)가 돌아오는 길에, 휘종(徽宗)이 보내준 대성아악에서 비롯된다. 이 대성아악은 환구(圜丘)·사직(社稷)·태묘(太廟)의 제향과 더불어 문묘제례에 썼다. 그러나 고려 말·조선 전기를 지나는 동안 점차 제례절차·악기·악장 등이 어지럽고 무질서해졌다.
그러다가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박연(朴堧)을 중심으로 한 여러 신하가 《주례(周禮)》 《통전(通典)》 ≪악서 樂書≫·≪석전악보 釋奠樂譜≫ 등 중국의 옛 전적을 참고하여, 아악의 정비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옛 주나라 때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산일(散逸)되어 광해군 때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준하여 복구하였으나, 연이은 병자호란으로 다시 중단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아악 복구사업을 펴다가, 영조 때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는 성종 때보다 규모가 축소된 것이며, 이것이 현재에 이르렀다. 이러한 수난 속에 이어진 문묘제례는, 중국 본고장에서는 없어진지 오래고, 유일하게 한국에만 남아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