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구성과 사학사적 가치
- 최초 등록일
- 2021.05.26
- 최종 저작일
- 20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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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구성과 사학사적 가치"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연려실기술
1. 편찬시기와 편찬자
2. 저술동기
3. 체제와 서술방식
4. 내용의 전개와 역사적 가치
Ⅲ. 사학사적 의의
Ⅳ.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 론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조선후기에 나온 야사의 결정판이라 할 만큼 높이 평가된 사서이며 또한, 조선 후기 사학사史學史 연구에서 특히 편사編史의 체제와 역사인식을 이해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서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연려실기술』은 그 내용이 아직 제대로 분석되지 않고 있으며, 서지학상書誌學上으로도 정본正本이 어떤 것인지조차 정확히 판별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편찬자에 대한 논란으로 역사인식의 추출이 어려움이 따르고 있어 역사인식의 면보다는 내용소개와 작사방식에 초점을 두어 서술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도 내용소개와 작사방식에 중점을 두어 서술하겠지만, 편찬자와 편찬시기에 관한 논란, 그리고 『연려실기술』의 역사인식 또한 부족하게나마 서술할 것이다.
Ⅱ 연려실기술
1. 편찬시기와 편찬자
『연려실기술』이 언제 편찬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다. 일부에서는 광문회본光文會本에 실려 있는 ‘연려실기술’이란 휘호 옆에 ‘원교옹圓嶠翁’이란 글씨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라는 낙관이 있는 점과, 『연려실기술』에 실린 8개조의 의례 중 제8조의 편찬자의 선친이 ‘연려실燃藜室’이란 현판 글씨를 써주었고 책이 완성됨에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는 기록을 서로 대비시켜, 그 편찬시기가 적어도 이광사가 생존해있던 시기, 즉 영조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의례의 이 관계 기록에는 ‘연려실’이란 세 글자만 썼다고 할 뿐이지 ‘연려실기술’이란 책이름을 써주었다고는 되어 있지 않아 의문이 남는다. 그런데 역시 의례의 제6조를 보면 정조正祖 14년(1790)에 금강산에 놀러가면서 미처 완성되지 않은 초고를 남에게 빌려주었더니 여러 손을 거치면서 등사되어 유포되므로, 다시 원고를 수정 • 보완하여 정본을 만들고 있다는 편찬자의 회고가 실려 있다. 이로써 본다면 적어도 정조 14년까지는 『연려실기술』의 초고가 일단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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