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남한산성 김상헌과 최명길
- 최초 등록일
- 2021.03.22
- 최종 저작일
- 20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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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는 말
2. 김훈 남한산성
1) 1636년 12월 남한산성의 전후 정치상황과 당시 정황
2) 김훈 남한산성 속 김상헌, 최명길의 애국심 차이
3. 프랑스 혁명과 맹자의 혁명론에 비추어 본 김훈 남한산성
1) 프랑스 혁명과 맹자의 혁명론의 공통 분모
2) 병자호란 당시 혁명의 요소
4. 나오는 말
본문내용
1. 들어가는 말
김훈 『남한산성』에서 다루는 내용은 ‘삼전도의 굴욕’으로 상기되는 병자호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처럼 병자호란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치욕의 역사이다. 우리는 이런 치욕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왜 치욕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지를 김훈 『남한산성』속의 상황, 즉 병자호란의 상황을 통해 도출해내보고자 한다.
본 고에서는 전후 정치 상황에 따른 병자호란의 발발 원인을 알아보고, 그 후 병자호란이 발발하였을 때 그에 대응하는 김상헌과 최명길의 태도 차이를 그들의 말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또한 혁명의 관점에 비추어 병자호란 당시 정치상의 문제점을 확인해봄으로써 당대의 문제점은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더 나아가 왜 치욕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지 논의해보도록 하겠다.
2. 김훈 『남한산성』
2-1. 1636년 12월 남한산성의 전후 정치상황과 당시 정황
1) 광해군의 세자 책봉과 대립군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황급히 삼고 전란 수습까지 의존하였다. 광해군은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을 가다가 영변에서 갈라졌다.선조는 의주로 향하고 광해군은 권섭국사의 직위를 맡아 분조 의 책임자로 평안도 지역으로 출발하였다.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어갔다. 그는 왜병이 서울을 물러난 뒤에도 각지를 다니며 군과 백성을 격려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 썼다. 의병장 출신들은 이러한 광해군의 모습을 보고 광해군을 지지한다.
2) 광해군의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후 선조가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광해군이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