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항쟁
- 최초 등록일
- 2021.02.21
- 최종 저작일
- 20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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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몽고항쟁"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몽고의 침입
2.몽고에 대한 항쟁
1)삼별초의 기원과 성격
2)강화도와 진도에서의 항쟁
3)제주에서의 항쟁
3.몽고에 대한 항쟁의 의의
1)몽고항쟁에 대한 보편적 시각과 비판
2) 대몽항쟁의 실상과 강화천도의 성격
3) 고려 강화천도가 가지는 성격
4) 강화의 성립과 삼별초
4.마무리
본문내용
1.몽고의 침입
고종 초에 몽고에 쫓긴 거란족이 고려에 침입하여 평양 부근에 몰려 있었다. 이때 고려와 몽고는 이들을 함께 소탕하였다. 이 일을 빌미로 몽고는 고려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두 나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1차 침입은 1231년 몽고군이 침입하여 강화 후 다루가치라는 감시관을 두고 물러갔지만 곧 2차 침입으로 이어졌다. 몽고군의 침입을 경기도 용인 처인성에서 김윤후가 물리친 후 3차로 몽고군이 한반도 남부 지역까지 침입하였다. 이때 부인사 대장경판과 황룡사 9층탑 등의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이후에도 침입은 계속되어 몽고는 4차 침입하였다. 1246년에 구유구(貴有 : 뒤의 정종)가 즉위하고, 1247년 앞서 요구했던 개경환도와 국왕친조가 되지 않은 것을 구실로 아무간(阿母侃)이 이끄는 몽고군이 침입하였다.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을 노략질했으나, 이듬해에 정종이 갑자기 죽자 몽고군은 곧 철수하였고 5차로 헌종이 직위하여 고려에 대해 국왕의 친조와 출륙을 요구하였으나 고려가 응하지 않자 여름에 또다시 출병하였다. 별초군은 몽고군과 교전을 전개했지만 각지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과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으므로 고려에서는 결국 개전 이래 처음으로 국왕이 강화도의 새 궁궐에 나와 예꾸가 보낸 사자를 접견했다. 이어서 안경공 창(安慶公)이 몽고로 입조의 길을 떠남에 따라 1254년 정월에 몽고군도 철수했다.
이후 6차 침입은 5차 침략 이후 출륙할 때 시중 최항을 비롯한 고려의 대신들이 나오지 않았고 몽고에 항복한 관리들을 처형한 사실을 비판하며 자랄타이(車羅大)가 이끄는 몽고군으로 이루어졌다. 몽골군은 내륙지역을 철저히 유린하여 강화도 고려정부의 굴복을 받아내고자 했다. 정부는 경상·전라의 별초군을 뽑아 올려 도읍의 경비를 강화했고, 각지에서도 백성들과 별초군이 몽고군에 대항했다. 이때 몽고군도 피해를 입었지만 고려의 피해는 더욱 커서 몽고군에게 포로로 잡힌 사람만 20만이고, 죽은 자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1255년 몽고군은 고려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책과 입보민(入保民)의 분전으로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듬해 9월에 철군했다.
참고 자료
박영규 《고려왕조실록》들녘 1996
이재범 《대몽항전의 성격에 대하여》백산학보 2004
강옥엽 《고려의 강화천도와 그 배경》인천문화연구 2004
김윤곤 《강화천도의 배경에 관하여》대구사학 1978
윤용혁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 일지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