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리포트] 한국 사진사 / 사진사와 미학 2차 과제
- 최초 등록일
- 2021.01.11
- 최종 저작일
- 20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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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A+리포트] 한국 사진사 / 사진사와 미학 2차 과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한국사진의 기원
2. 사진의 수용
3. 정착과 발달
4. 일제강점기
5. 광복 이후
6. 6·25 전쟁 사진
7. 60, 70, 80년대의 사진
8. 오늘날의 사진
9. 참고문헌
본문내용
1. 한국사진의 기원
한국에 사진이 처음 들어온 것이 문헌상으로 밝혀진 것은 1884년 지운영이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워 마동에 사진관을 차린 때부터라고 한다. 지운영은 개항기 한국인 최초로 고종의 사진을 촬영한 사진가 또는 서화가·문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통리외무아문의 주사로서 일본을 드나들면서 남보다 먼저 새로운 문물에 접했던 것이다. 그는 천부적인 예술적인 소질뿐만 아니라 건장한 체구와 기민성, 그리고 큰 담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구파와 개화파의 싸움에 잘못 휘말려 비운의 일생을 마침으로써 사진의 맥은 중도에서 끊기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사진의 본격적인 도입과 기술적인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에 들어와서부터이다. 이때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한국진출에 힘입어 일본인들의 사진관이 여러 곳에 생기고, 당시 고종의 시종이며 영친왕의 서예 스승이었던 서화가 김규진이 석정동에 본격적인 사진관을 차리게 된다. 그 당시 사회적인 위치와 서화가로서 예술계에서 차지했던 큰 비중으로 그가 차린 천연당 사진관은 사진도입기에 있어서 중요한 시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2. 사진의 수용
한국사진의 수용은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처럼 외국과의 통상과정에서 사진이 전래되거나 서양 제국주의의 강제 통상조약에 의해 사진이 들어오지 않고 예견치 않은 사건으로부터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사진수용은 중국의 사진수용에 비해 20년이나 늦은 1860년대에 가능하게 된다. 그 원인들 중 가장 큰 이유로는 중국 아편전쟁 이후 더욱 강경했던 천주교 박해와 외국 문물에 대한 쇄국 정책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들 때문에 중국에서 아편전쟁이 일어난 1842년 이후 30년간 조선이 지향한 쇄국정책, 특히 서양 문물에 대한 배타적 정책 가장 컸다고 말한다.
참고 자료
이경률, 「한국 최초의 사진에 관한 실증적 고찰」, (비교문화연구 제 56집, 2019.9, p281~314)
김상미, 「한국전쟁기 한국사진가의 사진사적 위상」,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27집, 2010년, p435~4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