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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흥선대원군 다시보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2. 흥선대원군의 집권 배경과 업적
3. 흥선대원군에 관한 평가
(1) 기존 학계의 평가
(2) 필자의 재평가
4. 결론
본문내용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인물을 연구하는 연구자의 시각과 시대를 해석하는 눈이 각자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인물을 두고 긍정적 혹은 부정적 평가를 내리게 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만큼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학계에서 주로 내리는 평가가 존재하기, 또 그 평가가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기존 평가에 휩쓸리기 쉽다.
이러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를 하는 주제에 흥선대원군을 선정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한국사에서 1863년은 고종의 즉위년으로, 1세기 이상에 걸쳐 대변동이 시작되었던 기점이다. 이 시기에 한국은 대내적으로는 봉건체제의 수탈에 저항하는 대규모 농민반란에, 대외적으로는 서구의 압력에 직면하여 전면적인 변혁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그 역사적 대응에 실패함으로 인해 식민지와 분단 등 비극의 역사가 필연적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역사의 초입 10년 동안의 조선 정치를 담당했던 사람이 바로 흥선대원군 이기 때문이다.
물론 본문에서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흥선대원군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폭압스러운 폭군이라는 평가와, 강력한 실천력을 가진 개혁가라는 평가가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논자가 천주교도의 처형과 쇄국정책을 놓고 폭군이라고 그를 평가하지만, 서원철폐나 여러 국내에서 펼친 정책에 대해서는 개혁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필자는 앞서 언급한 기존 평가에 각자 개인의 평가가 휩쓸릴 수 있는 점과 흥선대원군이 가진 대척(對蹠)적인 평가로 이루어봤을 때, 학계의 평가에 동요되지 않고, 내 스스로의 흥선대원군에 대한 평가를 내려 보려고 한다. 본문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어떠한 과정으로 집권을 하게 되었는 지와 그의 치세동안의 업적, 그리고 그에 대한 자세한 기존 학계의 평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후 여러 자료들을 토대로 필자 스스로의 흥선대원군에 대한 평가를 하고자 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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