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영화의 탄생 비평감상문
- 최초 등록일
- 2020.10.08
- 최종 저작일
- 2019.05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3,000원
소개글
"조선영화의 탄생 비평감상문"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한국 극장의 역사는 이제 백년을 조금 넘어섰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에게 극장은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문화 공간 가운데 하나로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극장은 대중을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극장의 대중 장악력은 근대 극장으로부터 그 기원을 지니고 있다.
1900년대 초부터 개화기 조선에 활동사진이 상영되기 시작했다. 활동사진은 근대 생활과 신문물에 익숙한 계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개항 이후 1899년 제물포와 노량진 간 철도가 놓였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나오듯 1901년 8월부터 전기가 설치되면서 서대문에서 홍릉까지 전차가 운행되었다. 주로 일본을 통해 서양 물건이 수입되면서 새로운 문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신문, 잡지, 라디오, 영화 등의 대중매체가 확산되었고, 근대의 생활에 익숙한 새로운 계층이 형성되었다. 도시 대중의 존재는 대중문화가 형성되는 가능성의 조건들
을 만들었다. 영화는 값싸고 재미있는 화려한 볼거리로 소설과 연극에 이어 대중을 사로잡았다. 조선의 영화 유입에 대한 기록에서 외국인이 상영의 주체였으며, 영화가 담배회사, 전기회사의 활동을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은, 영화가 자본주의의 전파와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활동사진은 곧 대중에게 근대를 상상하고 대리 체험하는 기능을 했다. 1920년경 경성의 인구 중 일본인은 전체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증가해 있었고, 이들은 상위 10%의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07년 경성 거주 일본인의 수가 급증하면서,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은 조선인 지역인 종로 중심의 북촌, 남쪽은 일본인 지역인 진고개 중심의 남촌이 민족적 경계를 지으며 식민도시의 구조를 이루었다.
1919년 연쇄극이 제작됨으로써 외국 영화를 감상하는 것만이 전부이던 시대에서 생산이 함께 이루어지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연쇄극은 연극과 영화를 결합한 무대극의 일종으로 야외 장면을 필름으로 촬영해 연극 무대가 진행되는 중에 상영하는 방식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