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책
- 최초 등록일
- 2020.09.28
- 최종 저작일
- 2020.04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 본 문서(hwp)가 작성된 한글 프로그램 버전보다 낮은 한글 프로그램에서 열람할 경우 문서가 올바르게 표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최신패치가 되어 있는 2010 이상 버전이나 한글뷰어에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개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책"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
Ⅲ. 임진왜란으로 보는 대외관계
Ⅳ. 결론
Ⅴ. 참고문헌
본문내용
16세기 동아시아 세계는 격동의 시기로 조선, 일본, 명 어느 나라도 안정적인 나라 운영이 불가능했던 시대이다. 명은 16세기에 들어서 북쪽에서는 타타르를 하나로 통합한 몽골이 명의 장성을 넘어 침략하기 이르렀고, 남쪽에서는 무로마치 막부 쇠락기에 슈고 다이묘들과 결탁한 일본 상인들이 명의 상인들과 함께 밀무역을 행하는 후기 왜구가 성행했다. 이러한 북로남왜의 시대에서 명은 군사비의 명목으로 막대한 금액을 지출해야만 했고 이외에도 일반 백성들의 고통이 극심하여 명의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장거정이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보수 관료들의 반대로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명의 황제였던 만력제는 향락에 빠져 정사에 소홀했으며 대신들은 당쟁에 몰두하느라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고 황실은 사치를 일삼아 명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조선은 일찍이 일본의 혼란기로부터 발생한 왜구의 노략질에 대응하기 위해 일련의 교린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센고쿠 시대의 혼란에서 왜구가 다시 성행하면서 명종 말기부터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까지 교역과 왜구의 발생이 동시에 진행되는 양상을 띠었다. 특히 이후에 사량진왜변, 을묘왜변의 발생으로 을묘왜변 이후 공식적인 통상 조약 체결은 단절되었다. 이러한 조선의 대외적 상황 외에도 내부적으로 조선은 국력이 쇠약해져 있었다. 이는 15세기 말부터 야기된 군역제의 모순으로 인한 수포제, 대립제의 성행이 군사 동원 체제를 무력하게 했고, 이로 인해 전국적 국방 체제인 진관 체제가 을묘왜변 이후 소규모 국지전에 적합한 제승방략으로 변한 것이다. 이러한 군사적 요인 외에도 네 번의 사화와 치열한 당쟁으로 인해 제대로 국정을 운영하지 못했던 원인이 존재한다. 이에 반해 일본은 100년에 걸친 센고쿠 시대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심복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0년 전국 통일을 완성하여 일본의 혼란을 수습하고 있었다.
참고 자료
김돈,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4』, 가람기획, 2012.
일본사학회, 윤병남, 『아틀라스 일본사』, 사계절, 2011.
박전열,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도의 정치적 요소」, 『일본사상』19, 2010.
윤유숙,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발발 전 한일교섭 실태」, 『일본학보』70, 2007.
한명기, 「임진왜란 직전 동아시아 정세」, 『한일관계사연구』43, 2012.
김경태, 「임진전쟁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화조건 연구」, 『조선시대사학회』68, 2014.
한문종, 「임진왜란 직전의 국내정세와 한일관계」, 『인문과학연구』21, 2009.